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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들, 4차 산업혁명 관한 ‘밀도 있는’ 학문적 논의 없이 재정지원사업에 이용했다”
“대학들, 4차 산업혁명 관한 ‘밀도 있는’ 학문적 논의 없이 재정지원사업에 이용했다”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8.04.16 12: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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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26주년 특별좌담: 4차 산업혁명과 지식의 과제, 대학의 미래

●일시: 2018년 4월 10일 저녁 7시
●장소: 서울역 코레일 KTX회의실
●토론: 김소영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국제정치·과학기술), 윤지관 한국대학학회장(덕성여대·영어영문학), 이태억 KAIST 교수(산업·시스템공학), 홍성욱 서울대 교수(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사회: 이덕환 <교수신문> 논설위원(서강대·화학)
●사진·정리: 윤상민·양도웅 기자 cinemonde@kyosu.net

이덕환 <교수신문> 논설위원(가운데, 서강대·화학)의 사회로 좌담회가 진행됐다. 이 위원의 오른쪽 시계방향으로 이태억 카이스트 교수, 홍성욱 서울대 교수, 윤지관 한국대학학회장 ,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

지난 2016년, ‘다보스포럼’의 창립자 클라우스 슈밥이 언급한 ‘4차 산업혁명’은 정보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전 세계를 강타했다. 그 누구도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한국사회와 대학도 이 모호한 단어가 몰고 온 높은 파고에 휩쓸렸다. 그 실체가 뚜렷하지 않다며 비판적 태도를 보였던 학자들도 시간이 지나며, ‘4차 산업혁명’은 어느덧 우리 삶 가까이 다가왔다고 인정하는 추세다. <교수신문>은 창간 26주년 특별좌담을 통해,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의 실체를 교육·지식적 측면에서 살펴보고, 이 용어가 대학가에 어떤 방식으로 통용됐으며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또 무크 등의 온라인 강좌로 교육패러다임이 바뀌는 이 시기에, 지식생산의 최전선에 선 대학은 어떤 인재를 길러야 할 것이며, 교수법, 대학 체제는 어떻게 변화해야 할 것인지, 그리하여 우리의 고등교육의 좌표는 어디를 가리켜야할지 모색해봤다.

 

"완성되지 않은 기술의 미래를 예측하고 그 완성되지 않은 기술이 가져다줄 사회적 변화를 미리 충분히 예상해서 그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과연 우리가 갖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대학 안에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얘기가 무성하지만, 정말 대학이라는 공간에 걸맞게 심도 있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덕환(사회): 교육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 등이 대학을 향해 4차 산업혁명의 전초기지가 혹은 선발대가 돼 달라는 요구를 하는 것 같다. 4차 산업혁명을 명쾌하게 정의내리기란 쉽지 않지만, 크게 기술혁신이라고 봤을 때, 연구를 하고 학문후속세대를 양성하는 대학의 교육 과정 또한 기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태억: 4차 산업혁명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실 참 어렵다. 하지만 기술혁신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인 것 같다. 산업이 급변하는 시기에 놓여있는 것 또한 사실인데, 고용시장도 구조적으로 큰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는 시점에 놓여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사회구조, 사회체제에 큰 변화가 일어날 조짐이 있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을 얘기할 때, 드론, 자율자동차 등을 말하는데,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디지털기술과 정보처리기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로 인해 학생들이 요구받는 능력이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자동화의 연장이라고 해야 할까? 사무직 업무도 점차 자동화될 것이다. 그 속도는 매우 빠를 것이고. 하지만 그러한 변화를 ‘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4차 산업혁명을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의 연장이라고 말하는 연구자도 많다.

윤지관: 기술혁신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와 사회체제 전체에 변화가 있을 때 우리는 혁명이라는 말을 쓰는데, 그런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조짐이 있다 정도로 말하는 게 정확한 것 같다. 유령이지만 조짐이 있기 때문에, 징후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문제는 이걸 우리가 실체처럼, 마치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혁명이라는 말을 사후에 붙였는데, 지금은 조짐만 가지고 혁명이라고 부르고 있는 실정이니까. 교육부에서도 대학재정지원정책의 내용을 많이 바꿨는데, 바꾸면서 내세운 1차적인 명분이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한 경쟁력 강화였다. 대학들은 교육부가 이러한 평가기준을 세우니 따를 수밖에 없는 실정이고. 하지만 교육부가 바라는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 거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해서 보다 차분하게 그 정의와 내용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덕환(사회): 4차 산업혁명이 갖고 있는 모호함, 그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체로 간주하는 정부, 그에 근거해 성급하게 추진되는 대학 구조조정사업 등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셨다.

김소영: 제가 항상 박쥐같은 입장에서 말씀드리는 것 같다(웃음). KAIST 입장에서는 KAIST가 과학기술 혁신의 선봉에 서야 하고 선봉에 서 있기 때문에,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해서 항상 앞장서서 이렇다 저렇다 말씀드릴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앞서 말하신 대로 4차 산업혁명이 허상이고 부풀려진 측면이 분명 있다. 하지만 사회과학자로서 봤을 때, 이 4차 산업혁명이라는 것이 담론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요즘은 4차 산업혁명을 소재로 다루지 않으면 논문도 통과가 되지 않고, 사업도 승인이 되질 않는다. 이것은 ‘현대적’이라는 것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것을 다뤄야만 한다는 시그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또한 교육의 측면에서 봤을 때도 AI를 근거로 더 이상 암기 교육은 시대와 맞지 않는 교육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4차 산업혁명이라는 것이 분명 허구적인 면이 있지만 사회적인 다양한 요구들을 끌어내는 기능들도 있어서, 순기능이 없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현대는 무엇이냐, 라는 질문을 던져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또 하나의 ‘패션’에 머무르면 안 된다는 우려가 있다. 최근 과기부에서 4차 산업혁명에 맞는 인재를 만들겠다고 하는데, 과거처럼 그저 맹목적으로 따라가야만 하는 어떤 것을 만드는 데 이 4차 산업혁명을 활용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생기더라. 오히려 4차 산업혁명을 통해 기존의 여러 가지 관행들을 점검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를 하고 싶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것이 담론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요즘은 4차 산업혁명을 소재로 다루지 않으면 논문도 통과가 되지 않고, 사업도 승인이 되질 않는다. 이것은 ‘현대적’이라는 것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것을 다뤄야만 한다는 시그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

 

 

홍성욱: 저는 4차 산업혁명이 비판할 부분을 더 갖고 있다고 본다. 일단 경제학, 기술사 등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1차 산업혁명, 2차 산업혁명에는 모두 동의하지만 3차 산업혁명에는 다른 입장을 갖고 있다. 하지만 3차 산업혁명이 정보혁명으로 촉발된 변화라는 것, 그러니까 정보에 따라 일어난 큰 변화라는 것에는 또 모두가 동의한다. 저도 마찬가지다. 다만 4차 산업혁명에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는 4차 산업혁명 또한 정보혁명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AI도 그렇고, 빅데이터 또한 용어만 빅데이터일 뿐이지, 많은 데이터를 생성시켜 그것을 활용하는 기술 혹은 관점은 이미 과거에 출현했다. IoT도 마찬가지고, 공장자동화도 1950년대부터 시작됐는데, 그것이 최근에 스마트팩토리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바뀐 것일 뿐이다. 그렇게 본다면 4차 산업혁명이 양적으로, 그리고 속도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날)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1970년대 이후에 일어난 변화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저는 정보화 사회에 대한 대응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대응을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정보화 사회의 핵심은 ‘연결’이다. 네트워크.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이 지금까지 예상할 수 있었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연결되고, 연결되지 않았을 때 발생하지 않았던 현상들과 효과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이견이 없는 산업혁명은 산업구조나 사회 구성 전체를 바꾼 1차 산업혁명이다. 그때부터 근대기 시작된 것이고.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근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4차 산업혁명이 과연 근대를 바꿀만한 변화인가 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

 

 

윤지관: 사실 60년대부터 정보화 사회로 가고 있었고, 그때부터 탈근대니 포스트모던이니 하는 얘기가 나왔다. 네트워킹, 지역소통 등의 양태도 90년대 이후부터 세계화시대, 지구화현상과 함께 얘기가 나왔던 것이다. 저는 ‘3차 산업혁명이냐, 4차 산업혁명이냐’라는 질문보다는 ‘근대에 살고 있느냐, 탈근대로 가고 있느냐’가 보다 본질적인 질문이지 않을까 싶다. 사실 역사적으로 이견이 없는 산업혁명은 산업구조나 사회 구성 전체를 바꾼 1차 산업혁명이다. 그때부터 근대기 시작된 것이고.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근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4차 산업혁명이 과연 근대를 바꿀만한 변화인가 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18, 19세기부터 근대적 대학시스템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여전히 4차 산업혁명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본다. 대학의 발전은, 국가가 1차 산업혁명으로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한 수요를 맞추기 위해 대학을 지원하면서 이뤄진 것이다. 이를 통해 대학이 발전하면서 전문가와 연구자의 자율성, 교수의 교권, 연구주제 선정에서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중시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1차 산업혁명으로 갖게 된 근대 대학의 기능을 종언시킬 정도의 힘을 4차 산업혁명이 보여주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덕환(사회): 완성되지 않은 기술의 미래를 예측하고 그 완성되지 않은 기술이 가져다줄 사회적 변화를 미리 충분히 예상해서 그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과연 우리가 갖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대학 안에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얘기가 무성하지만, 정말 대학이라는 공간의 걸맞게 심도 있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외부에서 오는 압력에 대응하느라 허겁지겁 바쁘기만 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윤 교수 말처럼 교육을 어떻게 하고, 학문을 어떻게 이어나갈 것인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라는 고민은 없고 표피적이고 자극적으로만 대응을 하고 있다.

김소영: 4차 산업혁명의 기술 가운데 하나가 AI인데, 정부에서 ‘AI 관련 인재가 드물다, 우리 학생들은 코딩은 잘하는데 인터페이스 전반을 설계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는 없다’라고 지적하며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키우라고 대학에 강하게 요구하고 있어 고민이 참 많다. 그런데 이 분야의 선생님들께서 정반대의 의견을 내놓더라. 컴퓨터학과 A교수는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을 키우는 것이 대학의 역할이라고 말하면서, 컴퓨터학과에서 정원을 조정해 AI 관련 학과를 만들고 학생들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런 움직임이 학과 중심주의, 학과 이기주의에 막혀서 변화한 현실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한다며 비판한다. 하지만 같은 B 교수는 완전히 다른 입장이다. 학문은 지식의 축적이고 그렇게 축적된 지식으로 학생들을 교육시키는 것인데, 사회의 변화에 따라 학과를 조정하는 접근은 완전히 잘못된 접근이라는 주장을 편다.  

이태억: 대학은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정부 간섭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대학 스스로 4차 산업혁명에 대해 판단한 뒤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정부재정지원사업이 나오면 거기에 줄 서고, 또 어떤 사업이 나오면 거기에 줄서는 식의 모습이 반복되고 있다. 대학이 좀 더 주체적인 결정을 하고 정부에 제언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홍성욱: 역사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한국 과학사를 보면 60, 70년대부터 특정 분야의 기술 발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이 분야의 인력이 현재 어떻게 되는가를 조사해서 기술자, 기술공, 기능공을 각각 몇 명까지 필요하니 몇 명까지 어떻게 늘리겠다는 계획을 아주 잘 세운다. 학교를 세워서 필요한 인력을 키워내고, 그게 어려우면 기존에 있는 학교들에 재정 지원을 해서 그 학교에서 인력을 키우게 만들고, 기업에게도 직원들에게 이러한 방향으로 트레이닝을 시키면 어떠한 지원을 하겠다고 말하고, 혹은 그 기간에 맞춰서 많은 인력을 한꺼번에 배출할 수 있는 전문대를 세운다든지, 이런 일들을 매우 잘 추진해왔다. 이게 한국이 발전에 성공한 이유 중의 하나다. 교육열도 높으니 이런 방식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주효했다. 그런데 사회가 변했는데도 이러한 방식을 계속 고수하고 있는 것 같다. 약 15년 전에 나노 붐이 불었을 때다. 정부에서 나노 인력이 얼마나 필요한지 측정해서 과거와 똑같이 대학들에게 지원을 무기삼아 나노학과를 세우라 했고, 정부가 그렇게 나오면 대학은 세울 수밖에 없었다. 기존에 있는 학과의 이름을 바꿔서. 그런데 이제는 이런 방식이 맞지 않는다는 거다. 그 당시 만들어진 나노 관련 학과 중에 현재도 학생들을 뽑고 가르치고 있는 학과가 얼마나 되는지 의심스럽다. 기술변화를 과거처럼 예측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기존의 학과들이 배출한 학생들을 추적조사해볼 필요가 있다. AI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계속 이런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과거 60, 70년대 기능공 양성하던 시스템을 갖고 지금처럼 불확실성이 높은 시대에 전문과학기술자들을 만들려고 한다. 

이덕환(사회): 지나치게 관료적인 군대식 인력 개발이 문제라고 본다. 제도 개선이 없다. 제도에 변화를 주더라도, 계획을 세우면서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미래예측이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어렵다. 과거보다 불확실성은 커져 가는데, 우리는 여전히 미래는 예측가능하다는 패러다임에 갇혀서 4차 산업혁명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윤지관: 미래 예측은 어렵다. 그런데 지난 정권이나 현 정권이나 앞으로 어떤 분야의 인재가 얼마나 부족할 것이라는 통계를 근거로 제시한다. 무엇이 어떻게 변할지 규정할 수 없는데 말이다. 물론 정부 입장에서 통계를 근거로 그러한 요구를 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문제는 그걸로 대학 구조조정사업에 ‘바로’ 적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대학은 인력을 기르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하나의 전공이 형성돼 학생을 선발해서 키우는 데에는 시간의 축적이 필요하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분야의 인재가 필요하니 어떤 학과를 설치해서 어떤 체제를 만들 수 있다고 정부는 생각한다. 그렇게 한다고 체제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데도 말이다. 4차 산업혁명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4차 산업혁명에 부합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거나 변화를 줄 경우에, 해당 대학에 가점을 주고 그에 맞춰 재정 지원을 해준다. 그럼 자연히 대학은 그 방향으로 유도될 수밖에 없다. 물론 대학이 사회에 필요한 인력을 기르는 데, 경제 분야든 기술과학 분야든, 그 분야에 부합하는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책임이 있지만 대학은 기초과학 훈련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걸 전혀 못하는 거다. 4차 산업혁명이든 창조경제든, 정부가 내세우는 담론이나 정책방향에 따라서 대학이 좌지우지되도록 하는 것은 대학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대학은 자율적인 연구자 집단이어야 하고, 경제논리나 정부논리와는 다른 맥락에서 움직여야 사회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한 기능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경제나 정부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 외에, 사회전체적인 방향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엘리트들을 길러내서 그런 문화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기관은 대학뿐이다.

이덕환(사회): 대학의 자율성이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과연 우리가 인력 양성 중심의 획일적인 정책에 대해서 우리 나름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시하거나, 우리 나름대로 생각한 적이 있는지, 우리가 자율성을 얘기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 자율성을 요구할 만한 노력을 했는가. 

이태억: 제가 몸담고 있는 곳이 공과대학이라서 사회적 수요에 맞춰야 한다는 생각이 깊이 박혀 있지만, 대학의 존재이유가 무엇이고 역할이 무엇인지, 대학이 추구할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하기보다, 이미 상당수의 대학이 사회에 인력을 공급하고 취업을 시키기 위한 역할로만 한정해 대학의 역할을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취업이 본질적인 목표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사회가 대학에 이러한 역할을 요구하고 그러한 방향으로 대학을 운영하라고 할 때 우리가 제대로 디펜스를 했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항상 정책의 도구로서만 대학이 이야기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초의 대학은 기초과학 혹은 인간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을 키우자는 것이 목표였다. 그것이 2차 산업혁명과 함께 사회적인 인력 수요에 맞추기 위한 형태로 변화한 것이고. 이때 현재도 각광받고 있는 경영학이나 공학 등이 대학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는 산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대학이 산업 현장에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력을 길러내야 한다는 요구가 강했다. 정리하면 제너럴적인 교육에서 프로페셔널적인 교육으로 대학 교육의 형태가 변한 거다. 그런데 바로 이때 정부와 기업,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대학이 완전히 도구화가 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것이 100년 동안 지속된 것이고. 지금은 이러한 패러다임에 대한 고민을 해봐야 할 시점이 아닐까.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 새로운 학과를 설치하는 방식은 아닌 것 같다. 이런 방식도 실은 산업발전에 맞춘 것이니까. 질문을 바꿔야 한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해진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특정 분야의 교육을 확대해서 국가 산업발전의 모멘텀으로 삼았다면, 사회적인 수요와 대학 공급에 미스매치가 생기면서 이러한 관계에 문제제기가 이뤄지고 있다. 대학 패러다임 전환에 대해 생각해야 할 시점이다. 

 

"대학의 존재이유가 무엇이고 역할이 무엇인지, 대학이 추구할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하기보다, 대학의 역할을 취업을 시키기 위한 역할로만 한정해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취업이 본질적인 목표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사회가 대학에 이러한 역할을 요구하고 그러한 방향으로 대학을 운영하라고 할 때 우리가 제대로 디펜스를 했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이덕환(사회): 상위권 대학은 교수인력을 양성하는 데 집중하고 있고, 중위권 대학은 취업을 시키는 데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 대학이 사회의 인력 수요에 신경 쓰고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이기적인 목적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  

홍성욱: 산업화 시대의 대학에 경영학과 공학이 주요 학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는 것이 최초의 근대적인 대학과의 차이점일 텐데, MIT도 경영학, 사회과학 등의 학과를 설치하면서 종합대학이 됐다. 그런데 상위권 대학의 경우에는 어떤 사회적인 변화에 대응하기보다는 교수를 양성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김소영: 지금 방식처럼 약대가 운영되고 있지 않을 때, 약대를 나와 약사가 된 분들이 뭐라고 그랬냐면, 대학에서 약대에 다닐 때 교수들은 교수 후보인 학생들을 교육하는 데만 집중했지, 사회에 나가 약사가 될 학생들이 어떤 공부를 해야 하고 약사가 된 이후에는 어떤 역할을 사회에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도 없으셨고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고 말하더라.

홍성욱: 교수 트레이닝 학과의 공통점은 각 교수들이 자신이 배운 모든 것을 학생들도 똑같이 모두 배워야 한다는 식으로 가르친다는 거다. 박사 학위를 받기 전까지 배운 것뿐만 아니라, 박사 학위 이후에 공부한 것까지 학생들에게 모두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다. 그 사이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을 텐데, 그 변화들을 학생들이 모두 배워야 한다는 태도로 학생들을 가르치니, 명백한 과욕이다. 이때 학생들에게 부과되는 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 교육 현장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게 주입식 교육이다. 사실 한 클래스에 도대체 몇 명이 교수가 되냐고 묻고 싶다. 현실을 정확히 봐야 한다. 한 조사에 따르면 한 사립대 자연과학대의 경우, 전공에 맞춰 직업을 가진 사람이 1/4도 안 된다고 한다. 3/4은 전공과는 다른 직업을 갖는 거다. 근데 학과에서는 철저하게 이 1/4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고. 3/4에 대해서는 초점을 전혀 맞추고 있지 않다. 이 점도 사실 심각한 문제 아닌가. 대학 자체의 반성을 하면, 대학은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조직이라고 생각한다. 기업과 비교해보면 우리는 전혀 안 바뀐다. 기업은 변화하지 않으면 낙오되는데, 교수들, 특히 테뉴어를 받은 교수들은 외부의 압력에 절대 반응을 안 하지 않나. 특권이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굉장히 문제적인 의식이자 태도라고 본다. 주관적인 경험일 수 있지만, 대학에서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많이 가르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140학점 들어야 전문가가 된다는 이 사고에서 탈피해야 한다. 해당 분야의 가장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노벨상 받은 사람들도 수업 많이 들어서 된 건가. 어떤 기업에서 굉장한 혁신을 낸 사람을 봐도 140학점이 자양분이 됐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한 과목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이 수업에서 세상을 다시 보는 방법을 배웠다, 상식을 깼다,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이것은 한두 과목에서 나오는 것이지, 140학점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교수들이 이런 자유를 가지면 좋겠다. 내 전공이 중요하니까 너는 이걸 이만큼 배워야 해, 이런 이기주의를 너무 자주 목격한다. 

윤지관: 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저 이외에 다른 선생님은 KAIST, 서울대다. 두 대학은 한국에 있는 대학 200여개 중에서 손에 꼽히는 특별한 대학이다. 거기서 도출된 반성이 ‘학생들을 교수 후보로만 가르친다, 지나치게 자기 전공만을 가르친다’는 것인데, 일면적으로는 맞다고 생각한다. 저는 대학 사회의 반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존재는 교수라고 생각한다. 학생도 중요하긴 하지만. 지금 여러 대학들이 취업기관화 됐다는 비판, 정부 주도의 정책에 순응하는 대학, 학과 이기주의에 매몰됐다는 비판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부를 탓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얼마나 교수들이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 공동의 대응을 했는지 자성하게 된다. 교수들을 양성하는 것에 두 분은 너무 치중했다고 하셨는데, 제 입장에서는 과연 교수 양성이라도 제대로 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또한 자기 전공의 제자들을 키우지만 전반적으로 필요한 분야에 키우고 있는가라는 질문도 덧붙이고 싶고. 대학원의 기능도, KAIST는 좀 다를 수 있지만 서울대의 경우 동대학원에 진학하라고 말하기보다 유학을 추천하는 상황 아닌가. 그에 따라 학문의 대미 종속성이 심화되는 실정이고, 이에 근거해 한국지식인들은 학자라기보다는 지식중개상이라는 비판도 나온 지 오래다. 또 한 가지는 새로운 교수를 임용하는 과정에서 교수들이 참여해 관여를 하는데, 자기 전공 이기주의로 교수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는 거다. 교수사회의 폐쇄성, 이것이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 점을 개선시키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하다. 

김소영: 1990년에 대학원생 수가 약 8만7000명밖에 안 됐는데, 현재 대학원생 수는 약 33만명이다. 이게 시사하는 건 대학원은 누구나 가는 곳이란 거다. 요 몇 년 전에는 학부가 그랬고 이제는 대학원이다. 과거 대학원 교육이 갖고 있던 특성인 수월성 교육은 이제 적합한 교육 방식이 아니게 된 거다. 보편적인 교육을 해야 해요. 교수만 키우는 게 아니라 취직도 시켜줘야 하고 직업교육도 시켜줘야 하고 시민교육도 시켜줘야 한다. 대학의 역할을 수십 년 전의 엘리트교육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오산이다. 지금의 대학과 대학원은 매우 성격이 달라졌다.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대학원 문제는 청년실업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대학원에서 무엇을 가르칠 것이고 대학의 역할을 무엇인가에 대한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접근도 유의미하겠지만, 당장 최근 20년 동안 대학과 대학원에 들어오는 학생들이 달라졌다는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홍성욱: 3차 산업혁명의 연장으로서의 4차 산업혁명을 보면, 새로운 기술을 체득해야 하는 주기가 매우 짧아졌다는 거다. 극단적인 예로, 어떤 분야에서는 대학에서 배운 것들이 6년만 지나면 소용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대학과 대학원의 기능 자체가 상당부분 그런 변화에 맞춰서 바뀌어야 하고. 평생교육의 역할을 대학원이 과감하게 흡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방향으로 대학은 변화할 것이고 변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본다. 대학에 들어오는 인원이 적어지니까 대학원의 인원이 적어지니까, 밖에서 일하는 사람을 데려오겠다는 접근이 아니라, 밖에서 강하게 말하는 필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가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20대의 젊은이들을 받아 교육을 시키는 것이 대학과 대학원의 역할이 이제는 아니라는 거다. 그 이상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대학에 들어오는 인원이 적어지니까 대학원의 인원이 적어지니까, 밖에서 일하는 사람을 데려오겠다는 접근이 아니라, 밖에서 강하게 말하는 필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가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20대의 젊은이들을 받아 교육을 시키는 것이 대학과 대학원의 역할이 이제는 아니라는 거다. 그 이상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덕환(사회): 현재 외부로부터 오는 4차 산업혁명의 압력이 어마어마하다. 대학이 배출해야 될 인재는 무엇인가, 우리가 과연 어떤 인재를 길러내야 하는가. 지식의 증진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대학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 교수법은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

김소영: 홍 교수 말처럼 대학이 고민해야 할 것은 평생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유엔보고서에서도 앞으로는 6번 정도 직업을 바꿀 거라고 예측하더라. 그런데 재교육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재교육은 보강이라는 차원에서 다뤄지기 때문에 현실의 변화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지난 세계경제포럼을 보면 배우는 것은 오히려 배우지 않는 것, unlearn이라고 말하는데, 좀 더 말씀드리면, 기존의 배웠던 전제들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느냐, 그게 가장 중요한 배움의 척도가 될 것이라 본다. ‘relearn’도 있지만 ‘unlearn’이다. 과거에는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 한 직장에서 평생 근무하는 체제였고 그러한 완전고용사회가 하나의 이상으로 자리하고 있었다면, 앞으로는 대기업의 수도 줄어들 것이고 평생직장이라는 개념도 완전히 사라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과거처럼 정형화된 직장에서 근무하는 사람의 수는 줄어들 테고, 지금 말로 많은 사람들이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돈을 벌 것이란 말이다. 이에 대한 대비를 대학에서 해줄 필요가 있다. 

윤지관: ‘대학 인재상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문제는 학생들과 대학이 처한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그 또한 다를 것이다. 과거처럼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성만을 기르는 것이 대학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많은 교육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앞으로는 기술발전이 급격하게 발달할 것이기 때문에 유연한 대처 능력을 키워야 하고 협업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게 창의력이라는 이야기도 덧붙이고. 비판적인 능력과 여러 문제가 한꺼번에 닥쳤을 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빠뜨릴 수 없다. 이런 방향으로 대학 교육이 변화해야 한다. OECD에서 제안하는 교육방법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능력들을 키워주는 것은 사실 대학이 최초로 설립됐을 때 대학이 추구했던 것, 즉 대학의 본령과 다름없는 것이다. 달리 보면 매우 역설적인 상황인 셈이다. 탈근대 혹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완전히 다른 국면에 우리가 서 있지만, 오히려 근대 대학이 추구했던 이상이 재차 강조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오히려 왜 그렇게 된 것인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AI가 여러 직업을 대체하면서 많은 일자리가 없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종합적인 능력이라는 것인데, 이런 배경에서 인간됨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문제를 사유하는 것이 중요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학생들이 적어도 대학에 있는 동안에는 그러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고민할 수 있게끔 만들어줘야 한다. 어떻게 하면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훈련의 장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됐든, 사회학이 됐든, 공학이 됐든, 의학이 됐든지 간에 대학에서 배우는 여러 과목 속에 그런 요소들이 많이 들어가야 할 것이다. 생명공학의 문제도 인간됨의 문제와 연결돼 있으니까. 또 하나는 배움에 열려 있고 비판적인 정신을 갖고 있는 창의적 인간이 되려면 대학 사회 자체가 학생들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풍토로 바뀌어야 한다는 거다. 학생들은 배우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주체성에 대해 자각하기 힘들다. 하지만 대학은 진리를 추구하는 곳이니, 학생도 같이 지식생산의 주체가 돼야 한다. 대학이라는 학문공동체 속에 미래 세대인 학생들도 중요한 주체로 들어와서 지식 생산의 주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현재 학생들은 너무 대접을 못 받고 있다. 학교의 중요한 결정에 학생들의 입장이 투영돼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민주적인 대학 내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 그런 분위기와 환경 속에서 학생 스스로가 자신을 훈련시킬 수 있는 습관을 기를 수 있도록 해줘야지. 그래야만 미래 사회의 인재가 될 수 있다. 주체적인 학생들을 길러낼 수 있는 교육환경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고 봤을 때, 서구 대학에 비해 우리 대학은 확실히 부족하다. 우리는 근대화조차 제대로 돼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4차 산업혁명과 같은 탈근대도 중요하지만, 근대를 제대로 달성하는 것이 탈근대의 초석이 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근대를 제대로 달성하면 탈근대에 대한 대비도 자연스럽게 이뤄지지 않을까?

김소영: 학생에 대해 이야기하시니 한 마디 거들면, KAIST나 이공계 대학의 경우, 정말 많은 학생들이 연구 프로젝트에 연구원으로서 참여하고 있다. 또한 학생들이 연구원에서 벗어나 직접 벤처기업을 창업해 당당히 기업의 대표로서 활동을 한다. 최근 한 연구개발 정책과 관련한 공청회에 참석했는데 이런 문제제기가 있더라. 한국연구재단에서 말하는 ‘학문후속세대’ 양성사업이라는 이름부터가 완전히 잘못됐다는. 이미 그들은 후속세대가 아니다. 엄연히 필드에서 뛰고 있다.

홍성욱: 1차 산업혁명, 2차 산업혁명, 3차 산업혁명에 대해 다시 말해볼 필요가 있다. 1차 산업혁명은 공장이 출현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었는데, 2차 산업혁명 막바지에 테일러가 등장해 테일러리즘을 주창한다. 즉 ‘사무실에 있는 내가 공장에서 직접 생산에 참여하는 너희들보다 더 잘 안다’라는 의식이 생겨나는데, 사무실에 앉아 있는 사람은 경영과 공학에 대해 더 잘 안다고 생각했으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사무실이 커지기 시작했다. 사무실만 갖고 있는 회사가 등장하고. 물론 많은 회사들은 사무실과 공장을 함께 갖고 있지만, 많은 대졸자들은 공장보다는 사무실에서 일하길 바란다. 공장은 고졸이나 전문대를 졸업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됐고. 그게 2차 산업혁명 때 만들어졌고, 3차 산업혁명 때부터 사무실 단위에도 공장 단위에도 속하지 않는 직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령 서비스 직종. 그때부터 새로운 직업군에 대한 공론화가 이뤄지기 시작했고 새로운 형태의 직업에 대한 탐구도 시작됐다. 이 직업군에 종사하는 사람의 수가 어디까지 증가할 것이냐는 질문들도 던져졌고. 우리나라만 봐도 사무실이 있고, 공장이 있고, 그 둘에 속하지 않는 서비스 현장이 있다. 대학병원이나 대형로펌이 아닌 곳에서 근무하는 의사나 변호사들도 서비스 종사자라고 할 수 있다. 제3의 직업군에 포함된다고 본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 대졸 실업난이라든지 취업 대란에서 문제적인 현상으로 봐야 할 것은 대학 졸업자들이 공장으로는 가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이다. 공장 업무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알바를 하면서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는 직업을 갖기 위해 준비하거나 알바를 계속해서 바꿔가면서 생활을 이어나가거나. 깨끗한 옷을 입고, 깨끗한 공간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데, 사무실이 수용할 수 있는 대졸자 수는 한계가 있다. 앞으로 이러한 상황이 더욱 가속화 될 것이라고 본다. AI, 빅데이터 기술 등으로 현재 사무실에서 수행되는 업무 가운데 많은 업무들을 AI가 대체할 것이다. 그럼 사람들이 사무실에서 일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그래서 나오는 대안 중의 하나가 공장을 사무실화 하자는 것이다. 그게 바로 ‘스마트 팩토리’다. 공장인데 지저분하거나 시끄럽지 않고 사무실처럼 깔끔한, 얼핏 보면 사무실인지 공장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는 공간이다. 거기에 대졸자들이 취직할 수 있도록 하자, 한국의 중소기업을 전부 ‘스마트 팩토리’로 탈바꿈 시키자, 이런 논의들이 오간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가능할지 의심스럽다. 또 지금보다 취업을 하지 못하는 학생의 수가 더욱 많아지고 기존의 관념에서 봤을 때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고 봤을 때,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에 의해서 대학은 압박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대학에게 학생들이 취업이 잘 될 수 있도록 사회에서 요구하는 능력들을 키울 수 있는 공부를 시켜달라는 것이다. 협업 능력, 창조 능력 등을 말해도 직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대학에 하는 요구의 강도가 더욱 강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과거처럼 기업에 취업할 사람을 염두에 두고 했던 교육을 바꿔야 한다. 특히 태도. 좋은 직장에서 승승장구할 것이라고 자명하게 생각하게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현실을 정확하게 보되 그러한 현실에서 좌절하지 않고 선택하고 대응할 수 있는 태도를 만들어줘야지. 지금의 교수들은 사실 전혀 그렇지 않은 세상에서 살았기 때문에, 굉장히 좁은 시각에서 사회와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다. 현재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고, 앞으로의 세상은 더 그렇지 않을 텐데. 요즘 젊은이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존감을 지키면서 살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는 거다. 힘들지만 대학이, 교수들이 나서서 도와줘야 한다.

윤지관: 제가 주목하고 있는 건 홍 교수의 지적과 함께 사회불평등 문제다. 첨단기술을 특정 집단이 독점하는 형태가 되면서, 그것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다. 단순히 기술혁신이 유토피아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디스토피아가 올 수도 있다. 직장 문제도 당연히 발생할 것이고. 이런 문제들은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사회적으로 해결할 전망이 없다면, 계층 간의 차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다른 양태의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현실적인 것 같은데, 과연 대학이 그러한 역할을 해야 하는 곳인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대학은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 곳이고 그러한 문제의식을 길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판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사회에 어떻게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개입을 할 것인가, 이러한 고민을 하면서 학생들을 교육해야 하는 것이 대학의 책무 아닌가. 

이태억: 무엇에 대한 고민보다는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본다. 대학의 학과와 전공 체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관점보다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대학교육을 바라보고 만들어야 한다. 교육하고 공부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꿀 필요가 있다. 현재 K-MOOC, 이러닝 등으로 인해 대부분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강의들은 쉽게 상품화가 돼 손쉽게 배울 수 있다. 즉 학사과정에서 보편적인 교육은 온라인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거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 좀 파격적으로 말하면, 강의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제가 없애지 않아도 없어질 거라고 생각한다. 

홍성욱: 졸업생 입장에서 대학교육의 미래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행복하지 않은, 불행한 대학졸업생들이 너무 많았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 바로 기술을 익혀서 취업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빚을 내고 대학에 진학해서 빚을 진 채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직장을 갖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청년실업이 현재 통계로 잡히지 않을 정도로 심각하다더라. 통계수치도 사실 끔찍한 정도인데, 통계에 포함되지 않는 실업의 청년들이 있다고 하니까, 현실은 통계보다 더 끔찍하지. 이런 현실을 저희 같은 교수들이, 혹은 기득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회구조를 좀 더 평등하게 바꾸는 데, 혹은 조금은 덜 갖고 살아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구조와 분위기를 만드는 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지관: 비슷한 생각이다. 대학이라는 공동체에서 학생들이 주권을 갖고 학교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자존감이라는 것을 획득할 수 있을 테고, 윗세대와 소통하는 경험을 하면서 이해의 폭을 넓힐 수도 있을 거다. 홍 교수 말처럼 교수들이 변화할 필요가 있다. 미래 세대를 위해서 우리들이 좀 더 나서야 한다.
김소영: 국가가 지식공동체에 주는 투자와 지원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국가로부터 투자를 받으면 지식공동체는 결과물을 내는 것이 의무였고, 여전히 의무다. 과거에는 이런 것에 대해서 지식공동체가 저항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재는 투자도 좋지만 지원을 해달라고 말하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묻지마 투자’를 해달라는 거다. 결과물을 요구하지 말라는 것, 즉 책임을지지 않겠다는 태도라 본다. 과거에는 국가에게 우리가 무엇을 잘해낼 수 있으니 투자를 해달라는 식으로 국가를 설득했다면, 현재는 인문학이나 과학기술 등은 모두 학문이기도 하지만 ‘문화’라고 말하면서 결과물을 내놓아야 한다는 책임에서 자유로운 지원을 해달라고 요구한다. 여기에 우리가 맞장구친 적이 많았다. 책임을 통감한다.

이덕환(사회): 대학에게 현재의 4차 산업혁명을 위시로 한 변화가 위기이기도 하고 기회이기도 한 것은 자명한 것 같다. 대학 바깥에 대해서 대학이, 교수들이 불평만하고 있을 상황은 분명 아닌 것 같다. 대학이 좀 더 주체가 돼 이러한 변화에 책임감 있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학생들에게 튼튼한 교육을 시켜주고, 세상이 어떻게 변화하든 세상에 나아가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학생들의 권리도, 교수들의 권리도 주장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이 좌담을 통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교수들이 책임감을 갖고 변해야 한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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