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5:10 (금)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할 때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할 때
  • 이영수
  • 승인 2018.04.16 10: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창간기념사

길을 걷다가 문득문득 멈춰서는 일이 잦아집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부터 소담스러운 꽃봉오리를 펼치는 목련까지 눈길을 사로잡는 4월의 나무와 꽃들. 세월의 흐름과 함께 굳어버린 얼굴에 일순간 미소라는 기분 좋은 균열이 일어나는 건, 아마도 이들이 우리의 눈뿐만 아니라 五感을 새로운 생명력으로 충만케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한 T.S. 엘리엇 시가 떠오릅니다. 1992년 4월. 학문의 자유와 대학의 민주화, 학술정보 제공과 대학문화 창달, 교권옹호와 전문적 권위향상을 사시로 창간된 <교수신문>. 26년이 지난 오늘, 과연 교수사회와 대학사회는 그때로부터 얼마나 진보했는가.

먼저 대학 안을 들여다봅니다. 다보스포럼의 창립자인 클라우스 슈밥이 2016년 언급한 ‘4차 산업혁명’. 여러 사건들 속에서 지식의 최전선에 있는 대학들은 연구와 교육에 매진했고, 이는 국가교육경쟁력 상승이라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만, 지난 2년간 한국의 대학 역시 이 4차 산업혁명의 높은 파도에 휩쓸렸습니다. 정보혁명의 연장선상에 있을 뿐 ‘혁명’이라 부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대학들은 앞 다투어 이 ‘모호한’ 용어를 차용했습니다. 4차 산업혁명 뒤에 빅데이터, AI 혹은 인문학까지 붙인 사업으로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기 시작한 것이죠. 비판적 지식인인 교수들이 나서서 4차 산업혁명의 실체가 무엇인지 심도 깊게 논의하기도 전에, 대학들은 재정지원사업이라는 유혹에, 또 구조조정이라는 칼날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4차 산업혁명의 시류에 편승한 것은 아닌지 自省해봅니다.

그리고 대학 밖에서, 같은 연구자이자 교육자이면서도 차가운 현실 속에 외면 받고 있는 시간강사들을 봅니다. 전임교수 못지않은 시수의 강의를 담당하고 또 학문적 다양성을 담보함으로 학문후속세대에게 자극을 주는 이들의 연봉이 최저시급에도 못 미친다는 한 조사결과를 보면서 씁쓸한 마음은 더 커집니다. 우리 모두 강사 시절을 겪었지만, 교수가 된 후에는 더 이상 이들과 같은 방향을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그들과 교수들은 다른 점이 별반 없음에도 마치 우리는 더 연구를 열심히 한 보상으로 교수가 된 것이라 생각한 것은 아닌가. 교권이 없는 이들이 느끼는 가장 큰 참담함은 동료 연구자는 물론 제자들에게 한 사람의 ‘주체적 연구자’로 대우받지 못한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수년째 국회에서 계류 중인 시간강사법이 올해는 과연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요? 이들에게 과연 올해는 따뜻한 봄이 찾아올까요?

그리고 교수들의 존재 이유인 우리 학생들의 무뚝뚝한 얼굴이 눈에 들어옵니다. 초중고 시절부터 수많은 경쟁 속에 대학에 들어왔지만, 學文의 즐거움을 누리기보다는 이전보다 현저히 높아진 취업문턱을 넘느라 토익 점수를 쌓고 아르바이트로 하루하루를 마감하는 이들에게, 同學의 깊은 정을 나누던 대학 캠퍼스는 요원해 보이기만 합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직업생태계 속에 내던져질 그들에게 우리 기성세대 교수들은 얼마만큼 관심을 갖고 다가갔던가. 연구실적, 정부지원사업을 핑계로 그들의 아프고 지친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대학은 지식생산의 최전선이자 학문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기에 교수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창간 26주년을 맞아 실시한 교수인식조사에서 교수 801명 중 50%가 ‘연구 업적’과 ‘과도한 행정’이 부담스럽다고 토로했습니다. 10년 전 조사에서는 ‘학교 내 인간관계’를 고민한 교수가 46%에 이르렀었는데, 점점 교수사회도 파편화돼 가는 건 아닌지 하는 우려감도 듭니다. 대학이 취업기관화 됐다거나 정부 주도의 정책에 순응한다는 비판, 학과 이기주의에 매몰됐다는 비판 앞에서, 교수들이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 얼마나 공동의 대응을 했는지 자문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다시 시작할 때입니다. ‘hic et nunc’, ‘지금 여기’에서 말입니다. 대학학문의 자유와 대학의 민주화를 위해, 양질의 학술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교수들의 폭 넓은 소통을 위해 다시 뛰겠습니다. <교수신문>의 26돌을 기억해주시고 축하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