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21:50 (금)
고전을 읽고 ‘거인’이 되자
고전을 읽고 ‘거인’이 되자
  • 강병곤 아주대 소프트웨어학과·BK연구교수
  • 승인 2018.04.16 10: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몇 해 전, 우연한 기회에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라는 책을 읽게 됐다. 다소 도발적으로 보일 수 있는 제목에 이끌려 멋모르고 집은 책이었지만, 제목이 내게 던져준 질문은 사뭇 진지했다. 이 책은 서른여섯 편의 짧은 문학 에세이 모음이다. 이 중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대목은 단연 1장에 나오는 ‘고전’의 정의를 설명한 부분이다. 칼비노는 어떤 미사여구도 없이 1장을 시작하자마자 ‘고전’의 열네 가지 정의를 나열한다. 저마다 위트 있고 합당한 설명을 단 정의 가운데 가장 우리의 마음을 끄는 설명은 단연 첫 번째가 아닐까 싶다. 

“고전이란 사람들이 늘 ‘다시’ 읽는 중이라고 하지, 읽는 중이라고 하지 않는 작품들이다.” 저자는 ‘다시’라는 단어가 유명한 작품을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위선을 대변할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고전을 한 번 읽은 사람과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이 동등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독 여부와 상관없이, 고전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에서 오는 부끄러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이해‘(력)을 필히 갖춰야 할 직업을 갖고 있는 내게 특히나 공감이 가는 해석이다.

나는 특별한 재능이 없음에도 어쩌다 보니 공부로 밥벌이를 하게 됐다. 그러나 재능 없음이 곧 연구에 대한 열정도 없다는 뜻은 단연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읽은 고전에 대한 내용도 연구 분야에 적용해 실천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분야의 고전이란 무엇일까? 인공지능 분야에도 늘 다시 읽고 있어야 할 고전이 있다. 문학 고전들처럼 유려한 문체로 우리의 감탄을 자아내는 것은 아니지만 치밀하고 엄격한 논리로 나름의 아름다움을 선보인다. 인공지능은 사실상 컴퓨터 과학과 수학의 교집합으로 보아도 무방하므로, 그 고전이라 함은 주로 고급 확률·통계와 선형대수 같은 고등 수학과 프로그래밍 방법론 같은 전산학의 기초 과목이라 할 수 있다. 이 학문들은 인공지능의 확고한 바탕을 이루는 동시에 여러 변화무쌍한 해석을 제공하기 때문에 충분히 '고전'의 범주에 든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고전에 대한 주변의 인식은 '늘 다시 읽는 작품'이 아니라 '읽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안 읽는 작품'이 된 것 같아 씁쓸한 면도 없지 않다. 최근 들어 인공지능 붐을 타고 이 분야에 입문한 사람들 중엔 수학을 기피하는 경향을 갖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아마도 너나할 것 없이 떠들어 대는 코딩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은 학문이고 진입 장벽이 높아서 그럴 것이라 사료된다. 

여기에 불을 지피는 또 하나의 요소는 알파고로 인해 각광을 받는 딥러닝 기술의 유명세다. 딥러닝의 발전에 따라 온갖 소프트웨어 패키지가 공개돼, 개발자들은 공개된 패키지들을 공산품 마냥 선택하여 쓸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 말은 곧, 수학을 거의 몰라도 모듈화된 패키지를 잘 조립하기만 한다면 괜찮은 성능을 내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수학의 기초를 닦는 것보다 높은 성능을 내는 결과물을 서둘러 만드는 편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진정으로 수학을 깊이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인공지능 연구를 해서는 안 된다. 고전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조차 없는 사람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겠는가?

사실 이 문제는 몇몇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4차 산업혁명’이라는 선전에 성찰 한 번 없이 성급히 떠밀려 전공 주제를 선택하는 모양새다. 물론, 이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기업들이 저비용 고효율을 위해 빠른 성과를 추구하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항상 새로움을 추구해야 하는 연구자라면 느리더라도 기본 바탕을 튼튼히 다져 놓아야 높이 올라설 수 있다. 우리가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서 멀리 보는 이유는 훗날 우리도 후배들을 태우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우리가 늘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거인이 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강병곤 아주대 소프트웨어학과·BK연구교수
인공지능 분야 가운데 기계학습과 자연어 처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