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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스탕달, 한국어문학 연구
니체, 스탕달, 한국어문학 연구
  • 방민호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18.04.09 1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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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방민호 편집기획위원/서울대·국어국문학과

겨울이 가까워 왔을 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다. 그는 자기 생애에 친구가 없었다. 그는 일찍 교수가 됐지만 그만두고 외국으로 떠다녔다. 자비로 마흔 권의 책을 출판했는데, 독일에 보낼 주소라고는 일곱 군데밖에 없었다고 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주인공은 그럼에도 자기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찾고 있었다. 생각했다. 그는 고국에 있는 자신의 당대의 사상의 동지들을 부르는 게 아니라고. 니체가 찾는 사람은 미래에 있었고 독일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니체가 소리 높여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설 것을, 선악을 넘어, 초인이 될 것을, 낙타가, 사자가 아니라 어린아이가 될 것을 주장할 때, 그것은 서구문화에 속한 이들만을 향한 외침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 인간의 조건을 넘어서고자 하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그렇게 많이 공명하면서도 그의 담론에는 ‘진리론’이 결여돼 있다고 보는 필자 생각의 근거다. 이효석은 장편소설 『화분』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리나 가난한 것이나 아름다운 것은 공통되는 것이어서 부분이 없고 구역이 없다. 이곳의 가난한 사람과 저곳의 가난한 사람과의 사이는 이곳의 가난한 사람과 가난하지 않은 사람과의 사이보다는 도리어 가깝듯이 아름다운 것도 아름다운 것끼리 구역을 넘어서 친밀한 감동을 주고받는다. 이곳의 추한 것과 저곳의 아름다운 것을 대할 때 추한 것보다는 아름다운 것에서 같은 혈연과 풍속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같은 진리를 생각하고 같은 사상을 호흡하고 같은 아름다운 것에 감동하는 오늘의 우리는 한 구석에 숨어 사는 것이 아니요 전세계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동양에 살고 있어도 구라파에서 호흡하고 있는 것이며 구라파에 살아도 동양에 와있는 셈이다.”

진리에 있어 동양이나 서양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서양이 오리엔탈리즘 식으로 더욱 많은 언표적 권력을 보유해 왔다 해서 그것이 그 진리성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듯 동양 또한 마찬가지며, 일본인도, 한국인도 그 점에서 같다. 과연 진리라는 것이 있느냐 하는 문제는 여기서 닫아두기로 한다.

봄이 오자 갑자기 스테판 츠바이크의 『천재와 광기』의 다른 장들을 읽고 싶어졌다. ‘카사노바’ 장을 읽고 ‘스탕달’ 장으로 옮겨오자 이 책은 새로운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적과 흑』, 『파르마의 수도원』의 저자는 지독한 에고이스트로서 그는 숱한 이름으로 ‘앙리 베일’이라는 자신의 ‘본 이름’을 감싸고 정체를 ‘숨긴 채’ 세상 속을 떠다녔다. 그는 군인이기도 했고 외교관이기도 했으나 그 어떤 것에도 자기를 내맡기지 않고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감각과 언어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에게는 프랑스라는 조국조차 믿고 의지할 만한 것은 아니었으니, 러시아 모스크바 원정에 가서도 그는 권태로웠고 나폴레옹의 몰락 속에서 외국 군대가 파리로 진주하는 중에도 그는 조국애나 애국심에 들뜨지 않았다. 무엇이냐 하면 그는 어떤 이데올로기나 ‘선제적’ 사상이나 집합적, 집단적 열병 같은 것에 휩쓸리지 않는, 독단적이면서도 고독한 사상가였다는 것이다.

한국어문학은 국가다, 민족이다, 근대다, 전통이다, 정체성이다 하는 관념들에 눌리지 않는 자유를 얻어야 한다. 예를 들어 춘원 이광수가 계몽주의자였다든가 민족주의자였다든가 대일협력론자였다든가 하는 평가나 분석에 대한 비판은, 그가 결국은 제국의 논리에 포섭됐다는 식의 또 다른 정치적 담론, 입장에 귀착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니체나 이효석이나 스탕달의 입각점이 이광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의 토대가 될 수도 있어야 한다. 현대의 한국어문학은 특히 일제 강점기의 저항 민족주의와 근대화론, 국민국가론 같은 담론의 노예가 되지 않을 때 비로소 새 지평을 획득할 수 있다. 한국어 문학을 정치적이거나 정치주의적 문학 수준에 묶어두는 것은 비단 작가들만이 아니라 그 연구자들이기도 하다. 지식인 스스로 자신을 묶어놓은 사슬을 풀어야 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해질 수 있을까?

 

방민호 편집기획위원/서울대·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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