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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코메디
오월의 코메디
  • 홍성태`/`편집기획위원·상지대
  • 승인 2003.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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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오월은 참으로 찬란하다. 신록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 오월이야말로 계절의 여왕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오월은 마냥 아름다운 계절만은 아니다.

1980년대 중반에 대학에 들어간 나는 첫봄을 아주 괴롭게 보냈다. 매일같이 열리는 집회며 시위를 쫓아다니느라 늘 피곤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더욱 힘들었던 것은 육체적 피로가 아니라 정신적 고통이었다. 그 봄에 나는 그 몇 해 전에 광주에서 벌어진 참상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됐던 것이다. 그때 본 짓뭉개진 시신의 사진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선연하게 남아 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전두환 일당은 그렇게 국민들을 무참히 도륙하고 권력을 손에 쥐었다. 너무도 끔찍한 정치적 반동이었다. 민주화를 향해 치달리던 우리의 역사는 돌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전두환 일당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기 위해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삼청교육대로, 감옥으로, 군대로 끌려들어갔다. ‘의문사’로 불리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죽음의 행렬이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온나라에 피를 뿌리고 권력을 쥔 전두환은 그 피로 물든 권력을 이용해서 엄청난 부를 빼돌렸다. 필리핀의 마르코스처럼, 인도네시아의 수하트로처럼, 그들은 혈안이 돼 천문학적인 돈을 챙겼다. 이런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졌으나, 1990년대에 들어와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실제로 확인되기도 했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전두환 일당은 엄청난 돈을 챙기기 위해 국민들을 쏘고 찔렀던 것이다. 그들이 챙긴 부정한 돈을 되찾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히 중요한 민주화의 과제다.

그런데 학살의 주범 전두환이 요즘 국민을 상대로 조금도 우습지 않은 코메디를 벌이기 시작했다. 자기가 가진 돈은 달랑 29만1천원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리발도 이런 오리발이 없다. 참으로 철면피한이기에 그토록 참혹한 학살극을 벌일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호화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자식뿐만 아니라 손주들까지도 억만장자라는 사실은 잘 잘려져 있다. 이런 그가 달랑 29만1천원밖에 없다고 누가 믿겠는가.

역사의 교훈을 잊는 자에게 역사는 반드시 복수한다. 이승만의 잘못을 잊고, 박정희의 잘못을 잊었기에, 전두환 일당이 이 아름다운 오월을 피의 오월로 바꾸어 버릴 수 있었다. 전두환 일당이 받아야 마땅한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오월은 언제까지고 피의 오월일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이 슬픔만을 되뇌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오월의 영령들을 위로하고, 그로써 이 아름다운 계절을 아름답고 즐겁게 보낼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홍성태 / 편집기획위원·상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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