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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의 나지막한 들과 숲의 평온함 느껴지는 은항아리
신라시대의 나지막한 들과 숲의 평온함 느껴지는 은항아리
  •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
  • 승인 2018.04.09 1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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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71. 은제도금조화문소호(銀製鍍金鳥花文小壺)

南北國時代 新羅는 세계적인 공예수준을 보유한 문화 선진국이었다. 石工藝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경주 석굴암(국보 제24호)을 꼽을 수 있으며 金屬工藝의 대표적인 작품은 국보 제29호로 지정된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호)은 1966년에 불국사 석가탑에서 출토됐으며 적어도 사찰의 창건시기인 서기751년 이전에 제작된 불경으로, 世界最古의 인쇄문화와 木刻技術을 동시에 추정할 수 있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과 빈번한 戰亂으로 인해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파괴돼 현재 전해지는 극소량의 유물로 당시의 세련되고 화려했던 문화를 추정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한 점 두 점씩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유물을 조사하고 연구하다 보면 언젠가 세계적인 수준의 新羅文化에 대한 밑그림이 완성될 것이다. 

현존하는 남북국 신라시대의 金屬工藝品은 대부분이 불교와 관련된 유물로서 불상, 범종, 사리기, 정병, 향로, 등잔받침, 촛대, 쇠북 등의 佛具類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예술성이 높은 유물일수록 대체로 불교와 관련된 유물이 대부분이다. 종교적인 특징을 제외하고 新羅人들의 自然觀을 추정할 수 있는 유물들은 매우 제한적이며 희소한데 (사진1)의 ‘銀製鍍金鳥花文小壺’가 종교적 색채를 띄지 않은 고급유물로서 좋은 사례이다.

1. 은제도금조화문소호와 유리구슬(남북국 신라시대)
1. 은제도금조화문소호와 유리구슬(남북국 신라시대)

이 유물은 銀으로 만든 항아리로 몸통과 뚜껑에 정교한 무늬가 새겨진 높이 5cm의 작은 器物이다. 무늬의 바탕은 동그란 魚子文 으로 가득 채웠으며 날카로운 釘으로 작은 벌, 원앙새, 풀, 꽃, 구름, 산, 나무 등을 쪼아서 새긴 후에 무늬부분에만 鍍金을 하였다(사진2).

2. 뒷면의 문양
2. 뒷면의 문양

무늬의 바탕에 동그란 어자문을 채워 넣은 이유는 새겨진 무늬를 더욱 도드라져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몸통의 바탕에 어자문을 새길 때에 내리치는 망치의 힘이 균등하게 배분되어야 고르고 일정하게 문양이 찍힌다. 고도로 숙련된 장인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며 찍혀진 어자문의 배열만 보아도 예술성의 높고 낮음을 판단할 수 있다(사진7).  

몸통의 바탕에 새겨진 어자무늬
7. 몸통의 바탕에 새겨진 어자무늬

작은 항아리임에도 불구하고 조형성이 매우 뛰어나며 釘으로 쪼아 조각된 毛彫技法의 섬세함이 대단하다. 立壺와 圓壺의 중간 형태로 몸통의 벌어진 입부분에 알맞게 뚜껑의 끝 부분이 오므라져서 서로 맞물리게 돼있다. 寶珠形의 뚜껑 꼭지는 별도로 만들어서 도금한 후에 끼웠으며(사진3) 몸통과 뚜껑의 무늬에만 부분도금을 하여 바탕인 銀의 하얀색과 도금한 무늬의 金色이 어우러져 화려함을 배가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뚜껑의 문양(부분)
3. 뚜껑의 문양(부분)

이 작은 은항아리의 무늬는 몸통의 아랫부분에 종속무늬로 꽃잎무늬를 둘러 새겼고(사진4) 그 위로는 평화로움이 존재하는 자연의 풍광을 주문양으로 새겨 넣었다. 작은 山은 고구려 벽화고분에 등장하는 것처럼 작게 표현했고 들에 노니는 벌, 꽃송이, 풀, 구름, 원앙새 등이 조합이 되어 섞여있으며 원앙새나 날아다니는 작은 새들과 식물의 줄기, 잎, 새의 깃털까지도 섬세하고 정교하게 묘사하였다(사진5),(사진6).

4. 꽃잎무늬
4. 꽃잎무늬

 

원앙새무늬
5. 원앙새무늬
벌과 꽃무늬
6. 벌과 꽃무늬

아울러 이 작은 은항아리 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전하는 유리구슬과 마노구슬이 함께 전한다. 1966년 가을 불국사 석가탑의 도굴사건으로 인한 탑의 일부훼손으로 그해 10월 13일 석가탑의 해체과정 중에 2층 탑신석 상면의 사리공에서 사리장엄구를 발견했는데 그중 작은 은항아리도 함께 발견됐다(사진8),(사진9). 

8. 불국사 석가탑 사리장엄구출토 모습
8. 불국사 석가탑 사리장엄구출토 모습

 

은제소호(신라 석가탑 출토)
9. 은제소호(신라 석가탑 출토)

불국사 석가탑에서 출토된 작은 은항아리(사진9)도 (사진1)의 은항아리와 비슷한 크기로 제작방식도 비슷하지만 몸통과 뚜껑에는 무늬가 없으므로 한 단계 아래의 공예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시대의 작은 은항아리(항아리 속에서 발견된 유리구슬과 함께)는 일본 동경국립박물관에도 한 점이 소장되어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경주 남산에서 출토됐다고 전해지며 불국사 석가탑에서 출토된 것처럼 몸통에 무늬는 없지만 현재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돼있다(사진10),(사진11).

 

10. 은제소호와 유리구슬(일본 동경박물관)
10. 은제소호와 유리구슬(일본 동경박물관)
은제소호의 측면
11. 은제소호의 측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銀製鳥花文小壺’는 이홍근 기증품으로 경주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며 뚜껑은 결실됐고 몸통의 무늬는 雙鳥文으로 무늬에만 鍍金을 했으나 몸통의 바탕에 어자문은 없다(사진12). 그나마 (사진1)의 ‘은제도금조화문소호’와 가장 근접한 유물로 비교할 수 있으나 유물의 보존 상태나 무늬의 彫刻에서 한 수 아래로 평가된다. 

은제조화문소호(국립중앙박물관)
12. 은제조화문소호(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시대의 유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일괄유물(사진13)이 있으며 뚜껑이나 몸통의 제작방식이 (사진1)과 유사하며 실 생활용구로 화장품그릇으로 추정된다. 

13. 은제소호(고려시대)

(사진1)과 비교될만한 유물은 약 700년의 세월을 내려와서 조선후기에 제작된 유물을 사례로 들 수 있는데 숙신공주무덤과 정조 후궁인 원빈 홍씨 무덤에서 출토된 작은‘ 銀製化粧品小壺’이다(사진14),(사진15).

14. 은제과실문소호
14. 은제과실문소호
은제수복강녕문소호
15. 은제수복강녕문소호

이 두 유물은 鍍金을 하지 않았고 무늬는 시대의 특성에 따라 신라시대와는 다르지만 몸통의 형태나 바탕에 찍은 魚子文과 釘으로 새겨진 毛彫技法 등에서 신라시대의 세공기술이 변함없이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숙신공주묘의 은항아리(사진14) 속에서는 분가루가 발견되어 피장자가 평소 사용하던 화장품용기로 추정되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수준 높은 조각이 시문된 작은 은항아리의 사례는 많지 않으며 시대에 따라서 그 용도도 변했다. 신라시대의 유물들은 대부분 석탑의 공양물로 발견돼 사리기로 추정하고 조선시대의 유물들은 무덤에서 출토돼 피장자의 화장품그릇으로 인식 됐다. (사진1)이나(사진10)의 은항아리처럼 유리구슬이 함께 발견된 것은 공양물로 생각할 수도 있다. 高價의 금속인 銀으로 작은 용기를 만들어 사용한다는 것은 그 용도의 차원을 넘어서 매우 이례적이며 극소수의 왕족이나 귀족층 에서만 가능했을 것으로 현존하는 유물의 수량도 소수에 불과하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 작은 은항아리(사진1)를 천천히 돌려보면 자연과 하나 되어 마치 신라시대의 어느 나지막한 들과 숲에 와 쉬고 있는 듯한 평온함에 사로잡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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