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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에게 절실한, 축적의 시간
연구자에게 절실한, 축적의 시간
  • 조성권 성균관대·삼성융합의과학원 연구교수
  • 승인 2018.04.09 1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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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신규 임용이 예정된 어느 박사 후 연구원의 연구부정 행위로 미국 텍사스 대학에서 Start-up fund(스타트 업 지원금) 200만 불을 회수하기로 했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당사자의 실명 및 소속이 공개된 사실과 더불어 내가 놀란 점은 신임 교원에게 주어진 ‘200만 불의 연구비’이다. 많은 수의 미국 대학은 이처럼 신임 교원에게 적지 않은 초기 정착금을 제공하며, 이를 통해 자유로운 연구 기회를 준다는 사실에 부러움을 느꼈다.

필자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임상약리를 전공하고 유전체를 연구하는 의과학자다. 필자가 졸업한 의대에서 아래 위를 합쳐 10년 동안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유전학 용어로 rare variant(희귀 변종)이라고 할 수 있다. 쉽지 않은 길이지만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지적 호기심’과 새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자기 주도적 연구 가설을 설정하고 이를 증명해내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지만,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듯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자로서 보람을 느끼고 이를 통해 인류 건강증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고 믿고 있다. 

매년 ‘국내 최고 인재들이 의대에 지원하고 있지만 기초 의사과학자는 고사 직전’이라는 기사가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일부 의과대학에서는 학문 후속세대의 기초연구 지원을 위해 기초 전공의 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임상 의사를 대상으로 전문연구요원 제도를 통해 기초의학을 연구하면서 대체 군복무가 가능한 의사과학자(Physician Scientist) 과정을 개설하고 있다. 박사를 받은 후 군의관으로 3년간의 연구 경력 단절을 경험한 입장에서 보면 좋은 제도라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또한 전체 의과대학에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며, 박사학위 취득자가 독립적인 연구자로 성장하기에 쉬운 환경은 아니다. 

의과대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전체로 시야를 넓혀 보아도 박사 후 과정에서 독립적인 연구를 시작해 볼 수 있는 자리는 많지 않다. 30대 초중반의 나이를 고려해 볼 때 그에 맞는 합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연구직은 한정적이다. 특히 사회적 의무나 출산 등의 이유로 박사 후 경력 단절이 있는 경우 그 기회는 더 줄어들 것이다. 보완책으로 Staff scientist 제도(미국 NIH에서 장기 연구과제를 지원하기 위해 박사학위 연구원을 고용하는 제도)나 독립적인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는 Career development grant (K award라고도 하며 미국 NI에서 시니어 박사학위 연구원을 지원하는 제도) 같은 제도가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연구를 통해 얻는 가치는 정량적 혹은 물질적 가치로 평가하기 어렵다. 자본주의 사회이기에 때로는 경제성에 대한 평가도 불가피하겠지만, 그렇게 평가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연구분야다. 개인의 능력을 정량화해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임 연구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축적의 시간이다. 아무리 좋은 씨앗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질 좋은 토양과 적당한 햇빛, 물,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일정 자격을 갖춘 신임 연구자가 독립적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해 주고 여러 성공적인 사례가 공유돼야 한다. 이러한 시스템이 안정되고 활성화된다면 후속세대의 연구가 활발해지는 ‘좋은 연구 생태계’가 구축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보실 여러 교수님께서 앞으로 좋은 연구 생태계 구축을 위해 제도를 개선 해주시고 응원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성권 성균관대·삼성융합의과학원 연구교수
연세대 의과대학에서 임상약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population genetics(집단 유전학)를 이용한 health disparity(보건 다양성) 연구를 수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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