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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이대로 방치할건가
번역을 이대로 방치할건가
  • 박상익 우석대·서양사
  • 승인 2018.03.26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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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자 김용옥은 그가 박사학위를 받은 하버드대의 경우 동양학 관계의 박사학위 논문의 반 이상이 번역으로 점유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 100년 동안 우리가 그들을 배운 것보다 그들이 우리를 배운 태도가 훨씬 더 철저하고 치밀했다고 주장한다. 번역이야말로 외국학 연구에서 가장 먼저 행해야 할 기초 공사라는 뜻이다.

독일의 사정은 마찬가지다. 튀빙엔대 한국학과 교수를 지낸 역사학자 백승종의 말은 김용옥의 주장과 일치한다. 독일 대학에서도 한국학 전공 석사·박사 학위논문의 절반 이상은 번역으로 채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철저한 역주와 해제가 곁들여진 ‘연구번역’이다. 실제로 최제우(崔濟愚)의 「안심가(安心歌)」, 『고려사실록』의 「성황당신앙(城隍堂信仰)」 관련 부분’에 대한 연구번역으로 석사학위 논문이, 김인후(金麟厚)의 「백련초해(百聯抄解)」 연구번역으로 박사학위 논문이 작성됐다. 이는 프랑스도 다르지 않다. 

미국과 유럽에서 외국학 전공의 석사·박사 학위논문 절반 이상이 번역으로 점유되고 있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떠해야 할까. 그들에게 동양학이 외국학이듯, 우리에게는 서양학이 외국학이다. 그들이 동양 연구를 번역으로 시작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서양 연구를 번역을 통해 접근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들이 외래문명을 자국어로 번역해 자국의 지식과 정보를 확충하고 있듯이, 우리 또한 세계의 지식을 우리의 모국어로 번역해 축적하는 것이 상식이다.

일본은 18세기 난학(蘭學)을 필두로, 19세기말 메이지유신 즈음엔 정부 내 번역국을 설치해 단기간에 수만 권의 번역서를 출간했다.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은 보수주의의 ‘경전’에 해당하는 문헌으로, 일본은 메이지 유신 직후인 1881년에 번역했다. 하지만 광복 이후 60여 년 동안 우리말 번역이 없었다. 2009년 봄 ‘진보 성향’의 한 서양사학자가 국내 최초로 이 책을 번역·출간했다. 우리 사회의 척박한 지식 인프라와 보수의 지적 게으름을 확인해 준 ‘사건’이다. 우리와 일본의 격차가 무려 128년이다. 

늦게라도 번역이 됐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일본이 19세기에 번역한 고전·명저 중 아직도 번역되지 않은 책이 부지기수다. 예컨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문명론의 개략』(1875)을 쓰면서 모범으로 삼았던 버클(Henry Thomas Buckle)의 『영국 문명사』(1861, 메이지 초기에 여러 차례 번역됨)는 아직도 우리말 번역이 없다. 

서양은 어땠을까. 유럽 각국은 근대 초기(16~17세기)에 라틴어에서 자국어가 분화되고 근대적 국민국가가 수립되면서 라틴어 고전을 자국어로 번역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대대적인 번역 사업을 펼쳤다(그 후 라틴어 아닌 외국어들로 확대).  

독일 문호 괴테(1749-1832)는 1825년 자택을 방문한 한 영국인에게 독일어의 우수성을 열정적으로 자랑한다. “귀국의 젊은이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독일어를 배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독일어를 잘 이해하기만 하면 다른 말을 많이 알지 못해도 되기 때문이지요. 그리스어나 라틴어, 이탈리아어나 스페인어의 경우 이들 나라의 최고 작품은 훌륭한 독일어 번역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목적이 없는 한 그 말들을 배우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들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괴테가 독일어의 콘텐츠를 자랑한 게 19세기 초의 일이다. 하지만 한국은 21세기에도 이런 자랑을 할 수 없다. 광복 직후부터 정부 주도로 대대적인 한글 콘텐츠 확충 작업에 뛰어들어야 했으나 때를 놓쳤다. 오랫동안 한글을 방치한 결과, 한글은 학문을 할 수 없는 ‘반쪽짜리’ 문자로 쪼그라들었다. 한글 자료만으로는 석사논문도 쓸 수 없다. 세종대왕의 후예라면서 한글에 몹쓸 짓을 해온 것이다. 

물론 대학원생이라면 전공 관련 외국어 습득은 당연하다. 그러나 기초지식을 널리 섭렵해야 할 학부생들마저 주요 필수도서들을 영어로 읽게 만드는 현재의 상황은 지극히 비정상적이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박상익 우석대·서양사
경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 『밀턴평전』, 『나의 서양사 편력』, 『번역청을 설립하라』등과 연구번역서 『아레오파기티카: 언론자유의 경전』, 『의상철학』 등 다수의 저서와 번역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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