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8:35 (금)
권위 있는 자가 제안한 성관계는 ‘동등한’ 관계가 아니다
권위 있는 자가 제안한 성관계는 ‘동등한’ 관계가 아니다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8.03.26 11: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텍스트로 읽는 신간_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수전 브라운 밀러 지음, 박소영 옮김, 오월의봄, 2018.03)

모든 강간은 힘을 행사하는 행위이지만, 어떤 강간범은 신체적인 힘을 넘어서는 권력의 우위를 활용한다. 이런 부류의 강간범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제도적 환경을 이용하는 데 비해, 그런 환경에서 피해자는 문제를 바로잡을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한다. 노예제에서의 강간과 전시강간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뿐 아니라 강간범들은 피해자의 저항을 약화시키고 시야를 왜곡하며 의지를 교란하는 권위적인 위계 구조를 제공하는 정서적 환경이나 의존 관계도 활용한다. 이를테면 어떤 치료사가 환자에게 불감증을 해결하는 방법이라며 자신과 성관계하자고 제안한다면, 그는 환자에게 강간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그 환자가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게 된다고 해도, 법정은 그런 정서적 강요를 강압적인 행위로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인기 있는 영화배우나 운동선수, 록가수, 집단 내에서 존경받는 남성처럼 가해자가 일종의 문화적 우상인 경우, 이들이 지닌 우상의 후광은 물리적 폭력을 덜 써도 된다는 심리적 유리함을 제공한다. 이 때문에 피해자는 너무 늦은 시점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곤경에 처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유명인사 강간 사건이 이따금 뉴스에 오르지만 보통은 어이없을 정도로 빠르게 사라져버리기 마련이다. 이런 사건은 여러 각도에서 ‘오염’된다. 분위기에 잘 휩쓸리거나 바보 같은 피해자를 무장해제시킨 강간범의 매려고가 인기는 그가 피고석에 설 때에도 방패로 작용한다. 강도나 사기 사건에서 피해자가 분위기에 휩쓸렸다거나 바보 같다고 해서 가해자의 죄가 가벼워지는 경우는 없지만, 강간 사건에서는 사정이 달라지는 것이다. 게다가 경찰과 검찰은 강간 기소로 자신의 평판을 망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피해자는 더욱 불리해진다.

데이트 강간을 비롯해 사건 전부터 피해자와 관계가 있던 남성이 저지른 강간에서도 강압적 권위는 피해자가 단호히 저항하기 힘들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사회적 통념상 데이트에서 여성에게 기대되는 행위를 해야 한다는 압력이 피해자에게 일종의 ‘권위’로 작용하는 것이다. 데이트 상황에서 가해자는 데이트 상대라는 위치를 이용해 유쾌함이 불쾌함으로 급격히 변하는 지점까지, 여성이 예상하고 대응할 수 있는 지점 너머까지 상황을 밀어붙일 수 있다. 공손하고 여성스럽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관습적 제약과 사회적 예의범절 때문에 피해자는 우아하게 참거나 가능한 한 요령껏 빠져나가야만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되며, 피해자가 정면으로 맞서면 행동규범의 선을 넘은 것이 된다. 경찰은 “그녀가 나중에 마음을 바꿨다”는 식으로 말하곤 하는데, 이는 피해자가 데이트 강간을 당했을 때나 지인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오직 사건 발생 후에만 자기통제력을 되찾아 강간당한 현실과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정에 선 이력이 있거나 서류상 그다지 훌륭해 보이지 않는 피해자는 재판에서 불리한 입장이 되는데, 데이트 강간 사건이라면 트깋나 더 불리해진다. 피해자의 모호한 행동은 정당성을 인정받기 힘들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페미니스트 관점을 가진 나조차도 “바보야, 왜 진작 그 경고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한 거야?”라도 소리치고 싶어질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물론, 핵심이다. 객관적인 기준을 적용하려고 애쓸수록 논란의 여지는 더욱 많아질 뿐이다. 어떤 사건이 강간 사건이지 결정하는 것은 주관적인 행동 요인이다.

여성들이 강간에 관해 남긴 이야기는 곧 권위가 부여된 자리를 점한 남성들이 저질러온 권위 남용의 구술사나 다름없다. 일종의 성적 치료를 은밀히 적용하는 치료사, 환자가 제지하지 못하리라 여기고 평범한 검진을 당혹스러운 신체 접근으로 돌변시키는 의사나 치과의사, 스타가 되고자 하는 신인의 야심을 먹이 삼는 프로듀서, 자신이 힘을 가진 학문의 장에서 학생의 이해관계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비틀어 악용하는 교수 등등. 이런 경우 가해자가 육체적 힘을 사용하기는커녕 협박조차 하지 않고도 성적 목적을 이루곤 한다. 남자들은 이런 사례를 유혹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권위를 가진 인물이 제안한 성관계는 합의에 의한 관계 혹은 ‘동등한’ 관계라고 보기 매우 어렵다.

강압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중에는 경제적, 정서적 강압도 포함되며, 사건 발생 시 피해자로 하여금 저항하기 두려워하게 만들 뿐 아니라 사건 후에도 피해자가 다른 이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게 만든다는 특징이 있다. 권위 있는 인물이 저지르는 강간은 권위를 존중하도록 훈련받아온 피해자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으며, 그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공모자라고 여기기도 한다. 권위 있는 인물은 그가 옳다는 분위기를 후광처럼 내뿜고 있어서 그 행동에 도전하기 쉽지 않다. 이런 구도에서는 피해자가 오히려 ‘잘못’한 사람이 되어버리는데, 과연 피해자에게 이것 외에 다른 위치가 가능하긴 한가?

□ 저자 수전 브라운밀러는 1935년 브루클린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코넬대를 2년 만에 중퇴하고 <뉴스위크>, <NBC TV>의 편집자, 기사작성자로 일했다. 홀로코스트 역사를 배우며 인종차별, 성폭력에 맞서는 운동가가 됐다고 고백했으며 1968년부터는 ‘뉴욕 급진 페미니스트’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는 저자의 1975년 저작물이다.

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