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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ento Mori
Memento Mori
  • 박혜영 인하대·영문과
  • 승인 2018.03.26 11: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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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흔히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고 한다. 중세 기독교의 엄격한 교리 때문이다. 하지만 중세라고 해서 사람들이 항상 종교적 윤리에 짓눌려 우울하게만 보낸 것은 아니다. 잉글랜드의 중세인들이 어떤 일상을 보냈는지 궁금하다면 영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프리 초서의 이야기 시집 『켄터베리 이야기』(Canterbury Tales)를 권하고 싶다. 때는 바야흐로 냇가에 수선화가 피어나고, 잔디위에 따스한 봄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하는 4월, 신앙심이 깊으면서도 세속적이던 중세인들이 런던에 모두 모여 켄터베리 대성당으로 순례를 떠나는데, 그 때 순례객들이 풀어놓는 이야기 중 하나를 소개한다. 

옛날 플란더스 지방에 세 명의 난봉꾼이 있었는데, 이 젊은이들은 음주가무에다 노름판을 벌이고, 욕지거리를 퍼붓고, 예쁜 색시들을 부르며 방탕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세 친구들이 주막에서 술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장례식을 알리는 조종이 들려왔다. 주막주인은 아랫마을에 돌고 있는 역병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면서 죽음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놈이라고 말했다. 죽음이란 순서도 없어서 남녀노소, 주인과 하인, 왕과 신하, 누구에게든 갑자기 찾아온다며, 참변을 당하기 전에 젊은이들도 미리미리 조심하라고 하였다. 이 말에 발끈한 난봉꾼들은 자기들이 죽음과 대적해서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세 친구들은 죽음의 문턱에나 있을법한 한 늙은이에게 죽음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 노인은 자기가 좀 전에 숲에서 헤어졌다며 숲 속 큰 참나무 밑에 죽음의 귀신이 있다고 했다. 

세 난봉꾼들이 한걸음에 줄달음쳐서 참나무 밑에 가보니, 이상하게도 아무도 없고, 나뭇잎으로 가려진 곳에 금으로 만든 둥근 궤짝만 있었다. 금고 속 돈뭉치를 보고 너무나 기분이 좋아진 세 사람은 죽음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서로 얼싸안으며 행운의 신에게 감사를 드렸다. 이들은 아무도 모르게 한밤중에 돈을 옮기기로 하고, 기다리는 동안 한 친구는 주막에 가서 술을 받아오고, 나머지 두 친구는 돈자루를 세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한 친구가 산을 내려가자마자 남은 두 친구들은 자기들끼리만 돈을 나눠 갖기로 음모를 꾸몄고, 마침내 주막에서 술을 받아온 친구가 도착하자 칼로 친구를 살해해버렸다. “자, 이제 됐으니 한잔하고 시작하세, 저 친구는 천천히 묻어도 되겠지”라며 남은 두 친구들이 술을 한 모금 들이켰는데, 둘 다 술을 마시자마자 온 몸을 부르르 떨며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주막으로 먼저 내려갔던 한 친구가 혼자서 금궤를 독차지할 요량으로 술에 독약을 넣어 두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서로 의형제를 맺었던 세 난봉꾼은 마침내 참나무 아래에서 그토록 고대했던 죽음을 다 같이 만나게 됐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순례에 동행했던 한 면죄승이 ‘탐욕은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주제로 한 설교에 나온다. 중세인들의 지혜에 따르면 죽음을 부르는 것은 무엇보다 탐욕임을 알 수 있다. 제 아무리 우정이 돈독하고 혈기가 왕성해도 인간 마음속의 탐욕을 경계하고 조심하지 않으면 죽음이 멀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은 유한한 시간 동안만 사는 존재인데 반해 돈에 대한 욕심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돈에 대한 탐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어서 결코 만족시킬 수가 없다. 러스킨의 말대로 내가 얼마나 부유한가는 남이 얼마나 적게 가졌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말은 우리에게 주어진 생의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정된 생명의 시간을 돈의 숫자를 무한히 늘리는 데에만 쏟아 부을 것인지, 아니면 친구를 사귀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탄하며 지혜롭게 보낼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아직 인류의 영혼이 순진했던 그 시절을 잠시나마 돌아보는 것은 탐욕을 절제할 줄 모르는 한 인간뿐 아니라 자연도 파괴되기 때문이다. 한 전직 대통령의 터무니없는 탐욕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절망감을 느끼는지, 얼마나 많은 자연이 고통 받는지를 생각하면 답답하기 그지없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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