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제임스의 독창성과 그 학문 세계에서 근본적 경험론의 의미 
윌리엄 제임스의 독창성과 그 학문 세계에서 근본적 경험론의 의미 
  • 민병교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
  • 승인 2018.03.26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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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읽기_ 『근본적 경험론에 관한 시론』의 한국어판 출판에 부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 연구자인 램버스(David C. Lamberth)는 『윌리엄 제임스와 경험의 형이상학(William James and the Metaphysics of Experience)』(1999)에서 “오늘날 윌리엄 제임스는 미국 실용주의와 관련해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삶에서 가장 다작했던 후기에 그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관심을 ‘근본적 경험론’의 … 발전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밝힌다. 최근 한국어로 번역 출판된 『근본적 경험론에 관한 시론(Essays in Radical Empiricism)』([1912] 2018, 갈무리)의 중요성은 이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이 글에서는 제임스가 독창적일 수 있던 원천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해 그의 학문 세계에서 근본적 경험론이 어떤 의미를 가지기에 이토록 중요한지, 또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함의를 줄 수 있는지 생각해보려 한다.

당대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의 원천

미국 최초의 신심리학자로서, 그리고 신심리학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심리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Psychology)』(1890)의 저자로서 한때 가장 권위 있는 심리학자의 위치에 올랐던 인물이지만, 오늘날에는 실용주의 철학자로 더 널리 알려진 제임스의 사상과 기여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하지만 그가 당대에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 중 한 명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가 이처럼 독창적 사상가가 될 수 있었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인간 경험에 대한 구체적 준거’를 통해 개념을 제시하려는 학문적 태도였다. 예를 들어, 가장 널리 알려진 개념인 ‘사고, 의식, 또는 주관적 삶의 흐름’도 경험되는 대로 의식을 관찰할 때 발견되는 사실은 지속적으로 느껴지는 사고 과정뿐이라는 결론으로부터 도출된 개념이었다.

이런 태도는 제임스를 궁극적으로는 형이상학적 탐구로 인도하게 된다. 그 이유는 1895년 『심리학 리뷰(Psychological Review)』에 실린 그의 1894년 미국심리학회장 연설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의식에서의 통일성(unity) 문제에서 시작해 어떻게 여러 사물들을 통일체로 알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1890년대부터 미국 심리학계에서 급증한 실험주의자들이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이유에서 무시하던 이 문제를 그가 논란을 무릅쓰고 제기한 것도 그것이 경험적으로 확인되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연설에서 그는 이 문제에 어떤 새로운 통찰도 제시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 문제에 대한 연구는 형이상학의 몫이므로, 형이상학적이고 인식론적인 연구를 심리학에서 배제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렇게 제임스의 관점에서는 철학의 영역뿐만 아니라 심리학의 영역에도 속했던 의식의 통일성과 사물들을 통일체로 앎이라는 문제의 해명을 위해 시작된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탐구는 이보다 훨씬 큰 기획이 됐고, 그 중심에 근본적 경험론이 있었다.

제임스 저작의 일관적 특성인 ‘철학적 태도’로서 근본적 경험론

근본적 경험론이라는 이름은 『믿음의 의지(The Will to Believe)』(1897) 서문에 처음 등장한다. 여기서 제임스는 이를 “철학적 태도”라 일컫는데(vii쪽), 페리(Ralph Barton Perry)도 『근본적 경험론에 관한 시론』의 「편집자 서문」에서 언급했듯, 이는 제임스의 모든 저작에서 일관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이다. 제임스는 『믿음의 의지』 서문에서 이 태도를 “사실에 관한 가장 확실한 결론들을 미래의 경험이 펼쳐지면서 수정되기 쉬운 가정들로 여기는 데 만족하기 때문에 … ‘경험론’이라” 부르고, “‘근본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일원론의 학설 자체를 하나의 가정으로 다루기 때문”이라고 밝힌다(vii~viii쪽). 즉, 근본적 경험론이라는 철학적 태도는 사실과 결론뿐만 아니라, 일원론이라는 전제 같은 더 근본적인 메타 사상도 경험적으로 검증하는 태도이다. 1904년 첫 출판되었고 이후 『근본적 경험론에 관한 시론』에도 수록된 「순수경험의 세계(A World of Pure Experience)」에서는 “하나의 경험론이 근본적이려면, 그것을 구축할 때 직접 경험되지 않은 어떤 요소도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직접 경험된 어떠한 요소를 배제해서도 안 된다”고 이를 정의한다(54쪽). 또한 1909년 출판된 『진리의 의미(The Meaning of Truth)』에 따르면, 근본적 경험론의 방법적 “공준은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은 경험에서 가져온 용어로 규정할 수 있는 것들뿐이라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xii쪽). 이 정의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근본적 경험론은 인간 경험을 초월한 모든 요소를 배제하고 인간 경험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모든 요소를 포함해야 한다는 방법론적 명제이다. 이처럼 제임스의 도발적 문제 제기와 독창적 사상 제시의 원천이 됐던, 인간 경험에 구체적 준거를 두는 태도가 근본적 경험론이라는 이름하에 방법론적 명제로 제시됐고, 이것만으로도 그의 학문 세계에서 근본적 경험론이 갖는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근본적 경험론의 방법론적 명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사실 명제, 즉, 제임스가 『진리의 의미』에서 급진적 경험론의 “사실 언표”라 부른 것이 있다(xii쪽). 이는 관계에 대한 문제였는데, 「2장 순수경험의 세계」에서 볼 수 있듯, 그간 “경험론자는 사물을 영원히 분리된 채로 내버려 두며, 합리론자는 그의 ‘절대자’ 또는 ‘실체’에 의해, 또는 … 다른 어떤 허구적 합일의 작인에 의해 느슨함을 교정”했다(62쪽). 이에 반해, 제임스는 같은 글에서 앞서 언급한 근본적 경험론의 방법론적 명제에 입각해 “경험들을 연관시키는 관계는 그 자체가 경험된 관계여야 하고, 경험된 어떠한 종류의 관계든 … ‘실재적인’ 것으로 간주돼야 한다”고 언급한다(54쪽). 이를 통해 제임스는 어중간한(half-way) 경험론에서처럼 경험되는 관계를 배제하지도 않고, 그 설명을 위해 합리론에서처럼 경험되지 않는 초월적 실체를 상정하지도 않는다.

순수경험의 형이상학

방법론적 명제와 더불어 거론되어야 할 근본적 경험론의 주요 측면은 경험의 형이상학이다. 『근본적 경험론에 관한 시론』에 수록된 글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 핵심이 되는 개념인 “순수경험(pure experience)”은 “삶의 직접적 흐름”으로(102쪽), “무엇(what)”인지 결정되기 이전의 “저것(that)”으로서의 경험이다(28쪽). 제임스는 이를 “세상에 단 하나의 일차적 재료 또는 물질, 즉 모든 것을 구성하는 재료”로 제시한다(20쪽). 즉, 그의 세계관에서는 순수경험 외에 어떤 것도 부재한다. 이 순수경험의 형이상학에서는 그간 존재(entity)로 간주되던 것이 부정된다. 예를 들어, 의식도 존재가 아니라, 특정 맥락에서 경험의 앎으로서 기능일 뿐이다(19쪽, 234쪽). 즉, “분할되지 않고 주어진 경험의 부분도 … 연합의 어떤 맥락에서 취해지면 … ‘의식’의 역할을 한다. 반면 다른 맥락에서 경험의 분할되지 않은 같은 부분은 인식된 사물의 역할, 객관적 ‘내용’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24~25쪽). 이처럼 존재로 간주되던 것이 특정 맥락에서 경험의 기능으로 설명되면서, 전통적인 사고/사물, 주체/대상, 실재/인식 등의 이원론적 구조들도 붕괴된다. 이처럼 제임스의 근본적 경험론에서는 모든 종류의 이원론이 붕괴되고, 오직 경험과 그 기능만이 남게 된다. 그리고 이 같은 형이상학적 토대 위에서 그의 모든 심리학, 철학 사상들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간략히 본 바로도 알 수 있듯, 제임스의 학문 세계에서 근본적 경험론은 그의 독창적 사상 제시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방법론적 명제이자, 당시 지배적 조류들의 형이상학적 전제들에 대한 경험을 중심으로 한 비판적 해체이자, 경험의,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한 그만의 독창적 형이상학으로, 그의 모든 사상 체계가 서있는 토대였다. 따라서 실용주의에 비해 덜 다뤄지지만 그의 학문 세계에서 근본적 경험론은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제임스의 근본적 경험론이 오늘날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함의를 잠시 생각해보려 한다. 그가 독창적이고 위대한 사상가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근본적 경험론을 비롯한 그의 사상 체계가 오늘날 주류라 말하기도 어렵다. 이는 제임스와 그의 동료들이 그 학문적, 제도적 적들과의 투쟁들에서 승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가 그토록 비판한 실증주의, 과학적 자연주의, 기계적 합리론 등이 단지 학문뿐만 아니라 현대인 전반의 사고를 지배하게 됐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제임스의 근본적 경험론에서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세계를 성찰해볼 수 있는 관점과 계기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여기서 오늘날 근본적 경험론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민병교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
서강대에서 박사를 했다. 대표 논문으로는 「고립된 윌리엄 제임스와 철학에서 분리된 심리학: 심리학사의 사회학적 재구성」이 있으며, 한국이론사회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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