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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의 맹아로서 일본과 조선의 공론장 비교
근대성의 맹아로서 일본과 조선의 공론장 비교
  • 문광호
  • 승인 2018.03.26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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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동서 문명과 근대’_ 제9강 박훈 서울대 교수(동양사학과)의 일본의 근대: 근대 일본의 공론정치와 민주주의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이 ‘근대화’를 시작한 지 150년이 지나고 있다. 이 150년은 일본뿐 아니라 동아시아 각국이 ‘근대화’를 지상목표로 격투해온 시간이기도 하다. 베버의 지시와 마르크스의 훈령을 떠받들어 20세기 내내 동아시아 각국은 서양의 ‘근대(성)’를 기준으로 자기 사회를 사고하고 비판하고 전망해왔다. 150년이 지난 지금, 이 지역 ‘근대(성)’의 행방은 어떠한가.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서구와 비슷한 현상, 혹은 근대성의 맹아 등을 찾아내려 한다면 동아시아의 경험적 현상을 왜곡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비교를 가능하게 하는 좀 더 묽은 개념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런 방법론을 공론(공론장) 연구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미타니 히로시는 자유로운 정치 비판이 가능한가의 여부를 기준으로 삼아, 매우 느슨하게 공론(공론장)을 규정하고, 대신에 절차를 중시한다. 

막부 말기 일본과 조선의 공론장 비교

공론 혹은 공론정치를 생각할 때 동아시아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조선 후기의 정치 상황이다. 히가시지마에 의하면 중세의 강호가 근세 도쿠가와 막번체제가 등장하면서 위축돼가는 데 비해 반대로 같은 시기 조선에서는 주로 사림(산림)을 담당자로 하는 공론정치가 만개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공론과 정부ㆍ국왕과의 관계이다. 조선의 경우, 공론은 곧잘 국왕ㆍ의정부와 대립했다. 정부 내에는 삼사(홍문관ㆍ사간원ㆍ사헌부)라고 불리는 언관이 있어 국왕과 정부를 가차 없이 비판, 견제했다. 이 언관의 활동은 세계사적으로 특필할 정도로 활발하고 강력했다. 정부 바깥에서는 사림이라고 불리는 계층이 서원, 향교라는 공간, 향회라는 조직, 상서와 서한이라는 매체를 이용하여 중앙정치에 발언했다. 조선 후기에서는 독서하는 공중(사대부=독서인)이 일상적으로 정부 비판을 행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같은 시기 일본의 경우 도쿠가와 막번체제가 조선이나 중국과 같이 일찍부터 거대한 관료제를 구축한 것은 사실이나, 그 성격은 사뭇 달랐다. 100여 년의 전국시대 끝에 성립한 도쿠가와 정권은 또 다른 전쟁을 예상해 군사조직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런 정부체제 내에 언관이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정책 결정에 공론이 반영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정치 이슈를 둘러싸고 전국적으로 공론이 형성되는 경우도 잘 보이지 않는다. 정책 결정은 대개의 경우 소수의 담당 役人과 그들을 보좌하는 실무진의 논의로 이뤄졌다. 자신의 관할범위가 아닌 문제에 대해 다른 부서에서 간여하거나 하물며 민간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드물었다. 

이런 상황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19세기, 특히 막말기라고 불리는 19세기 중반 경이다. 이 시기에는 公議輿論, 處士橫議라 불리던 현상들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기존의 정책 결정 시스템에 큰 변화가 생겨났다. 번 차원에서도 전국 차원에서도 어떤 이슈에 대해 광범한 논의를 요구하며 참여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군인으로서 정책 결정에 왈가왈부하기보다는 묵묵히 명령에 복종해야 할 사무라이들, 특히 하급 사무라이들이 정치에 발언하기 시작했다. 일개 소대장, 중대장들이 천하대사, 국가대사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무라이의 ‘士化’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어째서 군인정치의 도쿠가와 체제에 공론정치가 가능했던 것일까. 17세기 초에서 19세기까지 지속된 200여 년의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장기 평화는 도쿠가와 사회의 군사 지배 체제를 점점 변화시켰다. 18세기 중반 에도의 인구는 100만 명에 달해 세계 최대 도시가 됐고(한양은 30만 명 정도), 수많은 독서회, 사숙, 시사 등이 생겨났다. 더 이상 전투에서 공을 세워 출세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대신 ‘공부’에 열을 올렸다. 

공부 열기는 지방에 있는 각 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각 번은 엄청난 예산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앞다퉈 藩校를 세웠다. 18세기 말에 번교는 전국에 이미 150개, 19세기 전반에 200개에 달했고, 막말기에는 270개 정도였다. 거의 모든 번이 번교를 세운 것이다. 

조선의 경우 18세기에 서원은 최다 900개 교를 헤아렸고 그 서원 간의 네트워크는 촘촘하고 원활했다. 19세기에 활발해진 대민, 소민들의 향중 공론은 주로 향교나 향회를 기반으로 전개됐다. 과거 시험장은 전국의 유생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점에서 공론 형성의 계기 중 하나로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 규모가 엄청났다.
유럽의 경우, 하버마스는 공론 형성의 공간으로 커피하우스, 살롱 등을 주목했는데, 그에 따르면 런던에서는 1680~1730년 사이에 커피하우스, 살롱이 번창하여 18세기 초에는 3000개 이상이 됐고, 도시가 상대적으로 적은 독일에서는 지식인들의 만찬회와 국어학회가 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일본에서는 19세기 중엽 공론정치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공론정치의 본고장 조선에서는 19세기 들어 세도정치와 대원군의 서원철폐(47개 소만 남기고 철폐)로 공론정치가 크게 위축됐다. 일본에서는 막말기에 전국 차원에서나 藩 차원에서나, 모든 정치 세력은 정치의 방침을 ‘公議’, ‘公論’으로 결정하도록 주장했다. 더 이상 정책 결정이 쇼군이나 다이묘의 권위나 관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유지되기 어려워졌다. 공의와 공론은 이 시기에 지속적으로 그 정당성이 주장되어졌고, 어떠한 정치 세력이라도 공개적으로 그를 부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여전히 정치 관례나 정치 시스템은 잔존해 있었지만, 정치를 좌우하는 요소로 ‘토론’이 등장했고, 다이묘든 로쥬든 정책 결정과 정치 행위를 할 때 과거에는 그 과정의 ‘플레이어(player)’가 아니었던 사람들과도 토론을 행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어떠한 정책 결정이나 정치 행위도 원활하게 이뤄질 수 없게 됐다. 

박훈 서울대 교수. 사진 제공=네이버문화재단

이런 일본의 공론정치의 형성에는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조선과 비교할 때, 일본의 공론의 주요 무대가 도시였다는 점이다. 도쿠가와 시대 일본은 병농분리와 죠카마치(城下町) 건설로 대규모 도시가 전국적으로 만들어졌다. 앞에서 말한 대로 18세기 에도 인구는 100만 정도였고, 오사카 37만, 교토 35만이었다. 그 밖에 가나자와, 구마모토, 가고시마, 나고야, 히로시마 등 대번들의 죠카마치 인구가 5만 명을 훌쩍 넘었고, 웬만한 죠카마치들도 수만 명의 인구가 거주했다. 18세기 조선의 한양 인구는 30만 명 정도였고, 그다음으로 개성과 전주가 각각 5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 밖에 전국 300여 개 군의 관아 소재지인 읍의 인구는 대개 1만 명 정도였다. 

또 조선의 양반은 대개 읍내에 거주하기를 꺼렸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향촌 질서의 주재자, 담지자로서 향촌에 거주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사무라이들은 병농분리로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원 죠카마치, 즉 도시에 거주해야만 하는 도시민들이었다. 좁은 죠카마치에 그것도 신분별로 거주 지역이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급 사무라이들은 같은 지역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굳이 사발통문까지 돌리지 않더라도 죠카마치 단위의 공론은 용이하게 형성될 수 있었다. 19세기 일본의 공론이 주로 도시지역의 공론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은 조선과는 이질적이고, 유럽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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