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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적응과 극복 관점에서 본 중국 그리고 천안문
근대의 적응과 극복 관점에서 본 중국 그리고 천안문
  • 문광호
  • 승인 2018.03.26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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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동서 문명과 근대’_ 제8강 백영서 연세대 교수의 「중국의 근대 : 20세기 중국을 바꾼 세 가지 사건」

최근 중국 근현대사 연구에 작용하는 인식 틀이 크게 변하고 있다. 무엇보다 대국으로 굴기하는 중국의 현재의 요구에 대응한 것이다. 리화이인(李懷印)은 중국 근현대사가 ‘백년굴욕’의 역사가 아니라 ‘성공’의 역사라고 역설한다. 청 말의 역사가 좌절과 굴욕으로 점철되긴 했으나, 다른 “모든 비서방 국가로 넓혀보면 그것은 국가 전환의 매우 성공적인 역사”이며 따라서 중국 혁명이 추진되던 시대에 민족주의 역사 서사가 조성한 “지나치게 엄중한 피해자 심리를 소멸”시키는 것이 역사학의 중요한 과제로 부각된다. 

그러나 저처럼 장기 시간대에서 중국 역사의 구조를 파악하다 보면, 단ㆍ중기 시간대의 변화를 소홀하기 쉽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아편전쟁으로 불평등한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편입한 이후의 변화가 갖는 의미가 간과되기 마련이다. 그 폐단의 하나가 중국사를 성공의 역사로 파악하다 보면 ‘반식민지성’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해지고, (의도하든 않든) 중국 특수론(예외주의)에 귀결되기 쉽다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해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론(이하 ‘이중과제론’으로 줄임)의 유용성이 강조된다. 이 시각에서 볼 때, 우리는 중국 근현대사의 내부로 진입해 그 역동성과 복합성에 다가갈 수 있다. 

즉 근대에 성취함직한 특성뿐만 아니라 부정해야 할 특성도 있으므로 그 둘이 혼재하는 근대에의 ‘적응’은 “성취와 부정을 겸하는” 것이고, “이러한 적응 노력은 극복의 노력과 일치함으로써만 실효를 지닐 수 있는 것”을 일깨워준다. 이와 같이 정리된 이중과제론의 관점을 활용하면 중국의 근현대사를 보는 데 알게 모르게 작동할지도 모를 이분법적 사유에서 벗어나 각각의 치우침을 분별하는 지적 긴장을 유지할 수 있다. 그 결과, 중국의 과거는 물론이고 현실의 분석에도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 실천 방향까지도 확보하는 유용성이 있다.  
 
특히 근대성의 주요 지표의 하나로 간주되는 국민국가가 중국에서 형성되어온 과정이 ‘크고 강한’ 현대국가로의 전환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해방과 억압의 양면성’이 서로 얽혀 전개되어온 것이고, 국민국가의 적응과 극복의 이중적인 단일 기획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1919년의 5·4운동: 저항의 천안문  

5·4 사건을 겪으면서 청년학생층 사이에서 급증한 잡지와 동아리(社團)를 축으로 ‘신문화’가 확대되는 ‘운동’이 (베이징과 상하이를 넘어) 전국 주요 도시에서 전개되면서 곧 ‘신문화운동’이란 용어가 유행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 크다. 아리프 딜릭이 지적하듯이, 신문화와 5·4 사건은 학생 동아리 조직을 축으로 한 실천 과정을 통해 변증법적 결합을 보였던 것이다. 

양자의 관계는 리쩌호우(李澤厚)에 의해 ‘계몽과 구망(救亡)의 이중변주’로도 비유됐다. 5·4 시기에는 계몽과 구망이라는 두 과제가 상호 촉진하였으나, 그 이후 민족적 위기가 가중되면서 구국이 계몽을 압도해왔다고 설명된다. 민주ㆍ자유ㆍ과학을 추구하는 개인의 자각을 근대성의 성취해야 할 지표로 삼은 것이 계몽이고, 서구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집단 주체인 민족/국민의 저항(민족주의)이 곧 구망이다. 

서구화와 반제라는 서로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이 두 과제가 5·4기에 상호 촉진 관계에 있었다는 점을 간파했고 그것이 합리적으로 해결되기를 전제했다는 점에서, 그의 문제의식은 어느 정도 ‘이중과제론’의 문제의식과 통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단순히 전반적인 서구화론자로 보기는 어렵겠다. 그러나 (봉건주의가 잔존한다고 본) 중국 사회주의를 비판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너무 강한 나머지 서구 모델의 계몽 과제에 대한 낙관주의에 치우치고, 중국의 (흔히 반식민성으로 지칭되는) 조건에서는 근대 적응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근대 극복을 겸하지 않을 수 없는 맥락을 간과한 한계가 있다. 

백영서 연세대 교수. 사진 제공=네이버문화재단

5·4운동을 둘러싼 또 다른 쟁점은 개인주의, 국가주의(또는 애국주의) 및 세계주의의 관계이다. 중국 지식계는 ‘국가’나 ‘국가주의’ 또는 (정당과 의회 중심의) 낡은 정치에 대해 비판했다. 왜냐하면 민족국가 관념이 일차 세계대전을 야기한 직접 원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비판한 것은 ‘침략형 국가 관념’이었지, ‘救亡型 국가와 사회’ 및 ‘인류문명 진보적 애국주의’나 ‘세계주의적 국가’에 대한 이념은 중시했다. 약육강식의 세계 질서에 적응하는 ‘세계적 국가’가 아니라 인류가 상호부조하는 公理를 구현하는 ‘세계주의적 국가’를 성취하고 싶었던 것이다. 깊이 들여다보면 세계대전 이후 세계체제에 더 깊숙이 편입돼 戰間期 워싱턴체제 속에 처한 당시 중국의 위치를 직시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그들 논의의 전제였음을 간취할 수 있다. 

개인주의인가 아니면 국가주의(나 애국주의)인가의 이분법적 구도로는 당시 논의의 전모를 제대로 포착할 수 없다. 국가사상이 쇠퇴한 대신에 ‘사회개조’ 사조가 시대 조류가 되었고 ‘개인해방’은 약화되어갔다. 중국 지식인과 청년학생들은 국가나 정당정치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신문화운동의 사회적 기초(가정ㆍ개인ㆍ계급ㆍ노동ㆍ교육 등)를 개조해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다. 여기서 개인도 국가도 아닌 자발적 결사체의 연대의 경험이 특히 중시되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5·4기 개인(당시 용어로 ‘小我’)이 사회(와 세계인류, ‘大我’)에 융합되길 기대한 새로운 인생관이 풍미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당시 자아정체성의 위기에 처한 청년학생들은 ‘사회개혁적 자아’의 형성을 통해 그 위기를 극복했다. 즉 개인이 사회에 융합되는 매개로 ‘사회개혁적 자아’를 찾아낸 것이다. 

이 같은 변화의 추세를 적확하게 짚은 것이 1919년 여름 청년 마오쩌둥이 발표한 「민중의 대연합」이라는 문장이다. 이 글에는 5·4기에 형성된 민중의 소조직(‘小聯合’)이란 새로운 조류가 기존의 대조직(‘法團’)의 변화와 합류하여 어떻게 중국 민중의 ‘대연합’으로 발전해갈 것인지에 대해 그 가능성과 필요성이 설명되어 있다. 그는 개인과 국가를 넘어선 사회의 발견과 사회개조에 중점을 둔 것이다. 

5·4운동기 이래의 ‘상징화와 이미지화 촉진' 과정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한 (이념적) 입장에 따라 한때 신화화를 낳기도 했으나, 얼마 전부터 ‘신화’에서 ‘역사(현장)’로 돌아가는 추세이다. 그럼에도 5·4운동이 아직도 다시 불려나오는 비밀은 무엇일까. 단순히 ‘젊음, 국제성, 폭력의 조합’이 “20세기 중국의 걸어가는 길을 크게 틀” 지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참신하지만 단순한 것 같다. 그보다는 중국 정치, 문화 및 사회 변혁에 대해 전면적으로 성찰하고 자신의 이념을 행동에 옮긴35 주체의 자발성과 복합성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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