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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역사를 걷어내고 다시 쓰는 한국의 근대사
왜곡된 역사를 걷어내고 다시 쓰는 한국의 근대사
  • 문광호
  • 승인 2018.03.26 1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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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동서 문명과 근대’_ 제7강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의 「한국의 근대 : 산업화 추구와 국민탄생의 역사」

네이버문화재단 ‘열린연단’의 다섯 번째 강연 시리즈 ‘동서 문명과 근대’가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번 강연은 동서양 근대성의 한계와 가능성을 비교문화적 관점에서 검토하는 취지에서 기획됐으며 2018년 총 50회 강연이 예정돼 있다. 지난 세 차례의 강연에서 주요한 대목을 발췌·요약해 소개한다.
 
정리 문광호 기자 moonlit@kyosu.net

유럽의 역사는 근대의 준거로 긴요하게 쓰인다. 일본의 경우 ‘메이지 유신’의 성공을 근대적 경험으로 내세우고 탈아론을 주장한다. 역사에서 근대가 중요한 준거로 쓰이는 것은 근대가 역사를 발전적으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이정표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근대는 특정한 준거를 바탕으로 비교해 산출하는 것보다 역사 속에서 하나의 체제가 어떻게 변화했느냐를 놓고 판단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근대를 이해할 때 동원되는 역사가 왜곡됐을 경우다.

빛바랜 근대의 주역, 황제와 황후

이러한 점에서 한국의 근대는 일본 근대성의 강조 속에 왜곡된 측면이 있다. 먼저 한국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일본의 침략주의의 산물이다. 기쿠치 겐조는 황후 시해에 대한 국제적 변명으로 한국이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군주의 무능으로 강조했다. 

반면, 당시 왕과 왕비를 가까이에서 접한 미국인들의 기록은 사뭇 다르다. 1892년 1월부터 서양인들에 의해 간행된 <The Korea Repository(한국 소식)>란 월간지 중 1896년 11월호에는 국상 중인 왕을 인터뷰한 “한국의 국왕 전하(His Majesty, The King of Korea)”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서는 왕비에 대해 “타고난 능력과 강한 개성”의 소지자란 점, “좋은 교육을 받았고”, “한국 여성으로서는 한학(Chinese ideograph) 교육의 수준이 최고이며, 이 점은 아마도 동아시아 전체를 통틀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했다. 국왕에 대해서는 “왕은 매우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아 항상 곁에 책을 함께 읽고 그는 자기 나라의 고금의 역사에 어느 누구보다 정통하며, 왕은 진보적이며 동아시아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쉽게 보이는, 서양 사람이나 그들의 제도, 관습 등에 대한 편견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전한다. 

왕비에 대해 다른 증언도 있다. 1886년 7월 육영공원 교사로 부임한 애니 엘러스 벙커는 왕비의 侍醫가 돼 왕비가 시해당할 때까지 함께 한 사람이다. 벙커는 「閔妃와 西醫」라는 글에서 황후의 인품과 능력에 관하여 “명성황후께서는 남자를 능가하실 만큼 기개가 늠름하시어 그야말로 여걸이신 반면에 백장미 같으시며 고결하시고 아랫사람 대하시어는 부드럽기 끝이 없으시기 때문에 황송하나마 친어머니를 대하는 듯 친절한 태도로 모시게 되었다.”고 했다. 이 부분은 위 <The Korea Repository>의 왕비에 관한 언급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다.

게다가 이 시대의 왕정 기록인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는 정사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군주이며 왕비가 개입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와 관련하여 앞의 <The Korea Repository>의 인터뷰 기사에 언급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왕은 공무에 많은 시간을 들여 열중하고 매우 부지런하게 일하면서 정부의 모든 부서들을 감독하고 살핀다”고 했다.   

근대화 통해 중립국으로

1896년 대한제국 선포를 앞두고 고종은 미국 워싱턴 D.C를 모델로 서울의 도시개조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종과 시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근대화 노력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도외시됐던 역사의 진실 속에 밝혀진 근대화의 목표는 국제 사회를 대상으로 한 중립국의 승인이었다. 고종은 한국의 산업화에 필요한 차관을 주요 열강들로부터 받으면서 투자에 대한 안전관리가 곧 중립국 승인으로 이이지게 하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의 왕비 시해로 어쩔 수 없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지냈던 시간은 오히려 중립국이 되기 위한 노력을 쏟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왕은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축하사절을 파견하고 3백만 원(圓)의 차관을 얻기 위해 러시아와 교섭했다. 고종은 대관식 사절을 보내고 서울 도시개조사업을 시작했고 동시에 북한의 광산개발, 중앙은행 설립도 시작했다. 러시아를 비롯 프랑스 등 열강과의 접촉은 이러한 노력 아래 시도됐다.

당시 한국에서 농업은 산업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했기에 세금의 화폐 납부는 중요했다. 화폐 발행을 위해서는 보증으로 금괴가 필요했고 개발이 가능했던 다수의 금광에 열강을 끌어들인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현재의 평양을 西京으로 승격하고 도시개조사업을 추진하던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고종은 칭경예식을 독립국이자 중립국으로 승인받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한국 최초의 국제 이벤트는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1월 말에 공포된 영일동맹이 주는 구속감도 컸지만, 여름을 지나면서 콜레라가 돌기 시작하여 행사를 치를 수 없게 되었다. 영일동맹에 이어 미국의 루즈벨트 행정부마저 러시아를 견제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으면서 열강 외교관들의 태도는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 끝에 1904년 2월 6일 일본제국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일으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국의 주권을 탈취하기 시작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사진 제공=네이버문화재단

근대의 ‘민국’ 개념

숙종 이후 대한제국의 순종까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민국(民國)이란 용어는 영조, 정조에서 사용빈도가 의미 있는 정도로 등장하여 고종시대까지 점증하는 추세다. 

고종 조정에서는 군신 상하 간에 민국이란 단어를 상용하다시피 할 정도로 빈도가 높다. 심지어 동학농민군의 포고문(茂長縣, 東學農民 布告文)에서 輔國安民의 차원에서 “民이 나라의 근본[國本]”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37 유교의 위민의식의 근원인 『서경』의 ‘民惟邦本’이 수백 년의 시행 끝에 ‘民爲國本’으로 바뀌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고종이 반포한 「교육조서」는 왕실과 신민의 상호 의지 보육이 강조되고, 백성[民]의 교육은 곧 나라를 굳건히 하는 필수 과제라는 것을 강조한다. 

3월 15일자로 ‘태황제’는 「서북간도 및 부근 각지 민인들이 있는 곳에 내림」이란 諭書를 작성하였다. 유서는 근본적으로 1895년의 「교육조서」와 마찬가지로 역대의 상호 보육의 군신 관계를 전제하고 있지만 서두부터 훨씬 비장하다. 

 “내가 얼굴이 두껍고 겸연쩍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너희 만성이 있으니 이미 망했다고 말하지 말자. 나 한 사람의 대한이 아니라 실로 너희 만성의 대한이라.”고 언명하였다. 종반에 접어들면서 “독립이어야 나라이며, 자유라야 民이니, 나라는 곧 민이 쌓인 것이오, 민은 선량한 무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1895년 1월의 「홍범십사조」에서 시작된 문벌타파를 전재로 한 인재 등용의 원칙 선언에서 비롯한 고종의 군신관계 인식은 어느덧 ‘主權在民’의 인식에 성큼 다가가 근대의 큰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다. ‘선량한 무리’ 곧 ‘신성한 국민’이 탄생하는 공식적인 순간이다. 

메이지 유신이 지금까지 구미 외의 지역에서의 유일한 근대화 성공사례로 간주되어온 것은 사실이다. 한국, 중국 등의 근대화담론도 지금까지 그 대칭 선상에서 후진성과 결함이 강조돼왔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이라는 용어 자체가 침략주의를 감추기 위한 역사 왜곡의 산물이라면 동아시아의 ‘근대’에 관한 담론은 입론에서부터 새로운 틀을 세워야 할 것이다. 

한국의 근대는 이제 전통 사회에서 싹튼 근대 지향성을 바로 찾고, 이것이 구미의 근대를 만나 자기 변신을 꾀하는 과정과 성과를 주의 깊게 살피되, 그 진로가 일본의 침략주의에 부딪혀 겪은 역사 그 자체가 동아시아 세계의 근대의 문제로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의의가 부여될 수 있는가를 중심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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