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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조건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조건
  • 권지언 서울대 연구조교수(신소재공동연구소)
  • 승인 2018.03.12 11: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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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연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연구자라면 한 번은 해봤을, 아니 평생을 두고 해야만 하는 것일지 모른다. 필자 또한 박사학위를 마무리 하던 시기부터 이 고민을 시작해 지금도 매일 하고 있다. 소위 ‘박사학위’라는 것은 스스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는 자격증일 뿐이고, 이후에는 독립된 연구를 수행해야 한다고 흔히들 말한다. 즉, 학위과정 중에는 지도교수로부터 주어진 숙제를 잘 해결하기만 하면 되지만, 이후에는 창의적인 연구를 수행하여 독자적인 분야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의 경우 학위과정에서 유기물 형광체 연구를 했고, 졸업 후에는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연구를 좀 더 진행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정말로 도전하고 싶은 연구가 따로 있었다. 필자가 속해 있던 연구실은 유기물 합성을 기반으로 반도체적 성질을 갖는 유기소재의 개발, 이를 OLED, 태양전지 등과 같은 전자소자에 응용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필자는 다른 동료들에 비해 비교적 기초학문적인 연구를 하고 있었지만 자연스레 다양한 응용소자들을 접할 수 있었고, 깊지는 않았지만 유기물의 다양한 특성들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이차전지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유기물을 이차전지의 전극소재로 활용하는 연구가 큰 주목을 끌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상용화된 무기물 소재의 성능이 월등했고, 꾸준히 좋은 소재들이 개발돼 왔었기 때문에 비전도성인 유기물은 전해질이나 분리막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뤘고, 일부 전도성 고분자만이 커패시터(축전기)로서 연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무기전극소재에 대한 개발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고, 친환경 및 비용, 생체친화성 등의 이유로 여타 분야의 핵심소재가 유기물로 바뀌어 왔듯이 이차전지용 전극소재에 있어서도 유기물 연구가 앞으로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유기전극 연구가 1960년대부터 시작됐지만, 대부분 무기전극소재를 전문으로 하는 그룹들에 의해 이뤄져온 만큼 유기물 전공자가 기여할 수 부분이 많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우선 유기전극에 관심 있는 그룹이 드물었고, 필자의 전공은 이와는 동떨어진 광기능성 유기소재 합성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포닥 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다행히 박사학위 지도교수님께서 포닥 자리를 제안해주셔서 시간을 벌 수 있었고, 유기전극 연구 또한 진행할 수 있도록 배려 및 지원해주셨지만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2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었고 필연구실에 부담만 주는 존재가 되었다. 유기전극 연구에 전념하고 싶었지만 고용된 포닥이었기에 그럴 수 없었고 두 마리 토끼를 쫓다 놓치는 꼴이 된 것이다.

2016년,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혼신의 힘을 기울여 작성한 연구계획서를 들고 지원한 ‘대통령PostDoc.펠로우십’ 사업에 거짓말처럼 선정됐다. 연구 아이디어와 가능성을 인정받은 것도 기뻤지만, 무엇보다 원하는 연구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 매우 기뻤다. 지난 2년 동안, 연구재단의 지원 아래 연구 장비를 구축하고 독립적으로 실험을 진행할 수 있었고 현재는 작지만 성과를 내고 있는 중이다. 최근에는 전 세계의 다양한 연구그룹에서 유기전극에 대한 관심이 늘고 논문이 증가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2017년에는 국제유기배터리학회가 처음으로 조직됐으며, 필자 또한 조직위원으로 참여해 세계 유수의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필자의 경우 운이 좋게 지원을 받아 원하는 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학문후속세대들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올해는 ‘대통령PostDoc.펠로우십’을 선정하지 않는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물론 학문후속세대를 위한 다양한 형태의 지원이 이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의 지원만으로 원하는 연구를 진행한다거나 연구의 독립성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비전임이라는 고용형태를 고려해, 지도교수와 시너지를 낼 수 있으면서도 연구의 고유성과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새로운 지원 사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다.  

 

권지언 서울대 연구조교수(신소재공동연구소)

서울대학교 재료공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산화환원 활성을 보이는 유기물을 이차전지의 전극 소재로 개발하위한 연구를 수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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