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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학문으로서의 과학철학
메타학문으로서의 과학철학
  • 이상욱 한양대·철학과
  • 승인 2018.03.12 11: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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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과학철학에 관심을 갖게 된 시점은 과학철학이라는 단어도 모르던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현재 내가 공부하고 가르치게 된 분야가 물리학(과학철학이 아니라)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물리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엉뚱한 오해의 계기는 내 또래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천체물리학자 칼 세이건이 제작한 「코스모스」라는 다큐멘터리였다. 지금 보면 조악하게 느껴질 정도의 화질에 현재 과학 지식에 비추어 틀린 점도 발견되는 과학 다큐멘터리였지만, 당시 내게는 압도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걸작이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다큐멘터리의 거창한 제목(‘우주’)에 걸맞게, 나레이터 역할을 한 세이건이 우주 삼라만상의 온갖 재미있는 내용을 모두 엮어 요즘 유행하는 말로 ‘빅 히스토리’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냈다는 점이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문명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빅뱅 이야기가 등장하고 어느덧 금성의 대기 성분에 대한 분석으로 넘어가는 식이었다. 당시 이것저것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자연스레 이 모든 흥미로운 주제를 융합적으로 공부하는 분야가 물리학이라 믿게 됐고, 원래부터 좋아하던 물리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막상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해보니 살짝 당혹스러웠다. 대학의 물리학은 여전히 재미있었지만, 왠지 ‘코스모스’의 웅장한 스케일에는 미치지 못하는 좁은 분야라는 느낌을 받았다. 양자역학 시간에 측정 과정에서 파동 함수가 붕괴하는 설명을 듣다가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한 질문을 하면 그런 건 철학과에 가서 물어보라는 답을 받곤 했다. 하지만 정작 철학과 수업을 들어 보면 현대 과학의 연구 결과에 비추어 볼 때 ‘사실적으로 틀린’ 내용을 전제로 논증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을, 옛 철학자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위주로 진행되던 당시 철학과 수업에서 기대하기 어렵기란 마찬가지였다.

대학 시절 궁금한 게 많았던 나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여러 과목을 찾아 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각 학문마다 자신의 학문이 최고라는 자부심이 강한 분들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정작 동일한 연구 주제에 대해 다른 학문 분야에서 잘 축적된 연구 결과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아예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는 점도 발견했다. 예를 들어 경제학자들이 상정하는 ‘경제적 인간’은 심리학자들이나 인류학자들이 연구한 인간과 너무도 달랐다. 지금은 행동경제학이라는 분야가 등장해서 이 차이점이 어느 정도 극복됐지만, 2017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로버트 탤러조차 자신이 행동경제학 연구를 처음 시작할 때(대략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는 그런 연구가 ‘경제학’이 될 수 있느냐는 동료 학자들의 편견에 시달렸다고 고백했을 정도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나는 우리가 엄청나게 복잡한 세계를 비교적 단순한 ‘이론’ 혹은 ‘모형’으로 이해하려는 여러 방식 자체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모형 만들기를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과학적 ‘이해’의 본성이 무엇인지, 그 다양한 이해 사이에 협력이 어떻게 가능할지를 탐색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학부 졸업 당시 내 판단으로 이런 탐색에 가장 적합한 학문 분야가 과학철학이었다. 하지만 물리학 ‘연구’가 꼭 해보고 싶어 일단 물리학 석사 과정에 진학했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무척 잘한 결정이었다. 대단한 성과를 낸 것은 아니었지만 물리학 연구를 해본 경험은 과학철학 공부에 결정적인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응집물질 물리학이 어떻게 거시 세계를 모형화 하는지를 철학적으로 탐색한 내 박사학위 논문도 학부 물리학만 공부했다면 쓰기 어려웠을 주제였다.

과학철학을 포함해, 학문 분야로서 철학이 갖는 탁월한 장점은 근본적인 질문을 탐색하는 학문답게 연구 주제나 방법론에 있어 대단히 포용적이라는 점이다. 나는 이 장점을 최대한 살려, 과학철학의 연구 범위를 전통적인 인식론, 방법론, 존재론을 넘어서 보다 적극적으로 과학의 사회적, 윤리적, 정책적 접점을 탐색하는 주제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그런 확장을 통해 과학철학이 진정한 메타 학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마치고 런던정경대학교(LSE)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에서 ‘과학기술의 철학적 이해’를 비롯한 다양한 과학기술철학 관련 교양 과목을 개발·운영하면서, 현대 과학기술의 여러 철학적 주제를 탐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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