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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500년 시간의 두께 간직한 한반도의 족보를 만나다
4천500년 시간의 두께 간직한 한반도의 족보를 만나다
  •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DMZ연구팀 |
  • 승인 2018.03.12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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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서 강화까지 경계에 핀 꽃, DMZ 접경지역을 만나다_ 8. 서흥리 탐방안내소·출렁다리·마당바위·용늪 전망대·대암산 정상·서흥리 탐방안내소

하늘 가까이에서 만나는 산마루 습원: 대암산 용늪 생태탐방로

‘65년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림의 청정 자연’. 철책선 안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생명들의 모습과 함께 매스 미디어가 DMZ를 재현하는 익숙한 수사이다. 환경부와 국립생태원이 지난 2016년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DMZ는 한국 영토의 1.6%(1천557㎢)에 불과한 면적이지만 한반도 전체 생물종의 약 20%, 특히 멸종위기 동·식물 91종이 살아가고 있다. 아무나 갈 수 없는 곳, 비무장지대를 재현하는 ‘멋진 그림’은 기억 속에 저장된 그런 이미지를 소환하고 더 선명히 각인시킨다. 

하지만 관성적인 인식 틀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가로막기도 한다. DMZ 접경지역에는 희귀 동·식물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바쁜 손길과 군인들의 피곤한 얼굴도 스며들어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경계 부대의 시야 확보를 위한 벌목과 방화로 울창한 나무는 사라지고 낮은 관목지대만 펼쳐지기도 한다. 부대 잔반에 의존해 겨울을 나는 멧돼지 가족의 정겨움도 있고, 추수가 끝난 논에 앉은 배고픈 독수리의 쓸쓸함과 두루미의 우아한 날개 짓도 있다. 민통선 이북엔 인적 드문 농경지도 있고 지뢰지대 사이의 비탈길을 헤집는 비포장 군사도로에는 검은 연기를 내뿜는 군용 트럭이 달린다. 

대암산엔 4천500살의 늪이 숨 쉰다

그런데 강원도 인제와 양구가 맞닿아 있는 험준한 산악 지역엔 ‘청정한 원시 생태’ 같은 DMZ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멋진 곳이 숨어 있다. 바로 대암산(大巖山, 擡岩山) ‘용늪’이다.  

용늪은 천연기념물 제246호, 습지보호지역, 산림유전자원 보호림으로 지정돼 있다. 원래 근처에 있던 소규모의 습지를 ‘작은 용늪’, 대암산 정상(1천316m)에서 조금 못 미친 1천280m 지점에 펼쳐진 습지를 ‘큰 용늪’이라 불렀다. 하지만 ‘작은 용늪’은 토사가 유입된 후 훼손됐고 나무가 자라면서 현재는 늪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그래서 대암산 용늪은 국내에 하나뿐이면서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고층 습원’으로 보호 받고 있다. 

‘인제8경’ 중 제2경인 대암산 용늪 (사진 제공: 인제군청)
‘인제8경’ 중 제2경인 대암산 용늪 (사진 제공: 인제군청)

옛날 인근 산골 마을에 살던 주민들에게도 이 산마루 습지는 예사 풍경이 아니었다. 용늪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하늘로 곧 올라갈 龍이 잠시 숨을 고르며 쉬었다 가는 곳’이라는 전설에 담겨 있다. 용늪의 생물다양성에 대한 학계의 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68년으로 알려져 있다. 그 생태적 가치를 인정받던 용늪은 1997년 3월 국내 최초로 ‘람사르 협약 습지(Ramsar wetlands)’로 등재됐다. 2010년 8월엔 보존 면적을 확대 지정(1.36㎢)하고 민간 개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이후 민통선 내부에 위치해 일반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미지의 땅이었던 대암산 용늪은 지난 2015년부터 민간에 개방됐다.

용늪은 매년 5월 16일부터 10월 31일 사이에 하루 100명(인제군 50명, 양구군 50명) 이내로 사전예약을 통해 정해진 시간에만 출입을 허용하고 있다. 탐방객들은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숲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가벼운 등산과 트레킹 코스로 구성된 용늪 생태탐방로를 둘러볼 수 있다. 외부에서 유입되는 오염물과 늪지대의 부드러운 땅을 짓누르는 등산화의 발길을 최소화하자는 현세대의 작지만 엄정한 규칙이다. 이처럼 제한적으로 개방하고 있지만 용늪은 여러 환경 조건의 변화로 그 원형의 모습을 잃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남북의 적대적 분단으로 인해 원래의 모습으로 보존될 수 있었던 대암산 용늪은 후손들도 함께 감상해야 할 생태계의 독특한 터전이자, 통일 이후엔 남북주민들이 함께 찾아갈 공간이다. 

용늪 내부의 물웅덩이 (사진 제공: 환경부 보도자료, 2010.08.02.)
용늪 내부의 물웅덩이 (사진 제공: 환경부 보도자료, 2010.08.02.)

인제에서 승천하는 龍을 만나러 가는 길

언제든, 누구나, 혼자선 보러 갈 수 없는 곳이기에 더 그럴까. 등산가들이 꼽는 ‘한국 100대 명산’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대암산은 물론이고 산마루에 펼쳐진 용늪의 시원한 자태를 상상하면 이른 새벽의 출발도 설렌다. 대암산은 서쪽으로는 양구군 동면 팔랑리 및 해안면 만대리, 동쪽으로는 인제군 서화면 서흥리를 마주 보고 있는데 오늘의 출발지인 서흥리 탐방안내소로 가는 길부터 심상치 않았다. 국도에서 임도를 타고 들어와 이정표를 보며 산악 도로를 오르면 ‘낙석 및 커브 주의’ 표지가 운전자를 움찔하게 만든다. 내비게이션 지도 화면에서 길이 사라진 후에도 대략 7km의 비포장 산악 도로를 구불구불 올라간다. 곧 스마트폰 상단에 사선이 그어진 빨간색 동그라미가 뜬다. ‘통화 불가’ 지역에 들어서면 뭐든 빠르고 편하게만 사는데 익숙한 도시인들은 괜히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눈 덮힌 용늪 (사진 제공: 환경부 보도자료, 2010.08.02.)​
눈 덮힌 용늪 (사진 제공: 환경부 보도자료, 2010.08.02.)​

그런데 산짐승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런 인적 뜸한 곳이 얼마나 더 편안하고 안전한 곳일까. 용늪 덕분에 이곳은 인간의 시선에서야 호들갑 떨 만큼 영험한 지역이지만, 대암산을 삶의 터전으로 삼는 뭇 생명들에겐 그저 아늑하고 오래된 보금자리일 뿐이리라. 오르막길을 재촉하며 차를 몰아 오전 9시 출발 시간 전에 다행히 안내소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공기를 가득 들이 마시니, 그렇게 맑고 개운할 수가 없다. 안내소에서 상부로 400m를 더 올라가서 있는 ‘심적습지(2007년 발견, 0.12㎢)’ 안내판도 보이는데 현재 휴식기를 갖고 있다.  

처음 만난 해설사 선생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그리 힘들진 않을 거라며 탐방객들의 긴장을 풀어준다. 정해진 탐방로 외에 함부로 길을 이탈하거나 숲으로 들어가선 안 되며, 가져 온 음식물이나 쓰레기를 절대 버리지 말라는 당부도 들었다. 그리고 대암산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화장실을 들르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출발이다. 나무 데크가 놓인 시작 구간은 산뜻한 기분을 고조시키고 산에서 불어오는 늦은 봄바람이 정겹다.

안개 낀 용늪(좌) (사진 제공: 환경부 보도자료, 2010.08.02.)
안개 낀 용늪 (사진 제공: 환경부 보도자료, 2010.08.02.)

 
일행과 함께 대암산의 품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혼자 괜한 상념에 빠졌다. ‘사람들은 이 오지 고원에 숨어 있는 늪에서 왜 龍을 떠올렸을까, 이름 모를 나뭇꾼은 피어오르는 안개 사이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대단한 무언가라도 보았을까, 오늘 승천하는 늙은 용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까?’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가, 날씨가 쾌청하거나 ‘금강초롱’의 영롱한 자태를 가까이서 보겠다는 과한 기대는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저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천천히 걷자, 용늪의 얼굴을 겸허히 보고 무사히 돌아오자.’    

 

탐방객들은 좁은 숲길, 출렁다리, 넓은 임도, 평평한 마당바위, 계곡과 작은 폭포를 거치는 완만히 올라가는 트레킹 구간을 계속 걷는다. 계곡물은 용늪에서 흘러나온 물로 수량이 풍부하다. 휴식 시간을 겸해 드문드문 숲 해설을 들으며 7km 가까이 2시간 30분쯤 걸어가면 눈앞엔 어느덧 ‘용늪 전망대’가 보인다. 

늪 주변 탐방로에 놓인 널찍한 돌은 다른 지역에서 가져올 때도 모두 깨끗이 씻어 들여왔다고 한다. 일행들은 등산화에 묻은 흙을 털고 등산 스틱을 접고 고개를 들어 안개가 덜 걷힌 용늪을 오감으로 느껴보려고 한다. 탐방로 데크를 따라 늪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몽환적인 늪의 품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마저 든다.   

출렁이는 폭신한 몸체, 보드랍고 촉촉한 진흙 피부

용늪은 수천 년 동안 쌓인 식물부식층 위를 물이끼와 산사초가 그물처럼 감싸는 구조로 돼 있다. 용늪 위를 뛰면 마치 텀블링처럼 용늪 전체가 출렁거리며 탄력을 얻는다. 이 용은 폭우와 거센 바람에도 배를 뒤치며 출렁거린다. (『복사꽃 그 자리』, 김하기 지음, 문학동네, 2002, 7쪽)

1996년 사전허가 없이 訪北해 홍역을 치른 소설가 김하기가 출옥 후 처음으로 발표한 단편소설, 『용늪 가는 길』 첫 문장은 대암산 용늪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 작품의 인물들은 저마다 겪은 역사적 상처로 인해 어딘가 뒤틀려 있지만, 내면의 고통을 직시하며 살아가진 못한다. 잡지사 사진기자인 주인공 ‘해준’은 ‘80년 광주’의 기억 이후 변혁운동에 헌신했지만, 믿었던 동지들과 서로 배신하고 증오하는 사이가 됐다. 그런 해준이 한국전쟁 참전용사인 생태학 전공의 노 교수, 그리고 월남전 참전용사로 亥安面에서 돼지를 키우는 주민과 만나고 투탁거리며 다가서는 대암산 용늪은 앙칼진 발톱으로 서로 상처를 내는 ‘아픈 마음들’을 그저 말없이 감싸 안아준다. 한 개인으로선 어찌할 수 없이 도저히 흘러가는 역사의 간교한 운명, 거기에 휩쓸리며 상처 받은 인간들은 결국 자연의 거대한 품속에서 조금씩 ‘치유’돼 간다.

채집된 이탄층 (사진 제공: 환경부 보도자료, 2010.08.02.)
채집된 이탄층 (사진 제공: 환경부 보도자료, 2010.08.02.)

그런데 소설이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1998년 이전엔 군부대의 안내로 연구조사나 촬영차 방문한 사람들이 늪에 들어갈 수 있었던 모양이다. ‘용늪 안에 사람이 들어가서 뛴다’는 저 표현은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해발 1천300m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고원습지’라는 점 외에도 용늪은 두터운 ‘泥炭層’을 갖고 있어서 그 보존 가치가 높아 엄격히 보호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탄층은 완전히 분해되지 않은 식물의 사체가 진흙과 섞여 늪이나 못의 물밑에 쌓인 지층을 말한다. 이탄은 지하에 파묻힌 식물이 오랜 세월 동안 높은 압력과 열을 받아 생성된 石炭과 달리, 주로 벼과 식물인 사초나 갈대류가 지표면에서 불충분한 부패 작용을 겪었을 때 만들어진다. 최소 70cm에서 최대 1.8m, 평균 1m에 이르는 이탄 제일 아래층 꽃가루를 분석한 연구자들은 용늪의 ‘연세’를 약 4천500살로 추정했다. 그런데 습하고 추운 기후인 이 늪지대에서 퇴적의 속도는 무척 느려 진흙은 1년에 약 1mm밖에 쌓이지 않는다. 석회암 동굴의 종유석이나 석순이 자라는 속도에 비견될 만큼 인간사의 짧은 시간을 압도한다. 

용늪 일대는 연평균 기온이 4.4°c로 5개월 이상 영하의 기온에 머물러 있고 연중 절반 이상 안개에 휩싸여 있다. 또한 습도가 아주 높아 쌓인 눈이 잘 녹지 않아 식물이 살기에는 정말 가혹한 환경이다. 그런데 그 악조건으로 인해 식물이 완전히 분해되지 않고 잔해가 쌓여 이탄층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곳의 독특한 환경에 적응한 동·식물은 특화된 생명력을 갖추었기에 희귀종이나 멸종위기종이 많을 수밖에 없다. 

생명의 터전이 되는 이탄층도 흘깃 보면 검은 곤죽처럼 보이지만, 사실 탄력을 갖고 흔들리는 거대한 묵 덩어리처럼 밀도가 높다. 이탄층에 함유된 퇴적물엔 반만년 가까이 자연이 기록해 온 방대한 분량의 생태 자료가 압축돼 있다. 더불어 그 동안 한반도의 대지가 겪은 기후변화와 자연재해의 흔적도 들어 있다. BC 2,333년에 세워졌다는 ‘단군조선’보다도 더 오래된 용늪의 이탄층은 그 자체로 지구의 역사를 발췌한 ’자연사박물관‘이자, ‘한반도의 족보’라고 할 수 있다. 3차원 공간에서 용늪이 보여주는 무량한 깊이감은 기실 무심히 흘러간 무수한 시간들의 두께이다.  

기생꽃 (사진 제공: 환경부 보도자료, 2010.08.02.)
기생꽃 (사진 제공: 환경부 보도자료, 2010.08.02.)

혹독한 추위와 높은 습도에서 자라난 용늪의 식물군은 죽은 후에 반쯤 썩어 곱고 찐득한 뻘이 되고, 서로 엉겨 붙어 ‘라텍스 매트’ 같은 탄력성을 갖는다. 그 폭신한 이불 위에 사람 무게의 충격이 가해진다면 그 진동은 반경 5미터까지 전달되어 퇴적층을 파괴한다. 수많은 풀과 풀이 그 자리에 쓰러져서 만들어진 이탄층은 스펀지처럼 물을 가득 머금었다, 뱉어냈다 한다. 마치 살아있는 것들 마냥 숨을 쉬는 땅이다. 그 곁에 숨죽이고 앉아 작게 흐르는 물소리를 듣노라면, 오래 전에 죽은 것들이 사멸되지 않고 다시 살아 있는 것들에게 숨을 불어 넣어 주는 輪回의 바퀴를 보는 것 같다.   

그렇게 용늪 앞에서 무릎 꿇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진흙의 대지는 자신이 품고 있는 것들을 보여준다. 용늪에서만 자라는 특산식물, 벌레를 잡아먹고 사는 식충식물, 각종 야생화를 포함해 총 252종의 습원식물들이 곳곳에 드러난 검은 이탄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도시 생활의 피로감에 찌들어 있는 탐방객들에겐 그들의 이름을 듣는 것으로도 ‘힐링’이 되는 것 같다. 잠시 읊어 보자. 

‘산사초, 삿갓사초, 골풀, 달뿌리풀, 가는 오이풀, 용늪 엉겅퀴, 물이끼, 큰용담, 물매화, 흰금강초롱, 비로용담, 칼잎용담, 제비동자, 진범, 기생꽃, 조름나물, 끈끈이주걱, 북통발 ….’ 

조름나물 (사진 제공: 환경부 보도자료, 2010.08.02.)
조름나물 (사진 제공: 환경부 보도자료, 2010.08.02.)

한편, 듣던 대로 늪에 고인 얕은 물은 차갑다. 먹잇감이 부족해서 어류는 살지 못하지만, ‘물두꺼비·도롱뇽·개구리’ 같은 양서류의 보금자리이다. 늪 주위의 대암산에선 멸종 위기 야생동물로 지정된 ‘왕은점표범나비, 참매, 까막딱다구리, 삵(이상 2급)’이 서식하고, 멸종위기 1급 동물이자 천연기념물 제217호인 ‘산양’도 관찰됐다. 이러한 용늪에는 ‘생물 다양성의 寶庫’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남방 식물과 북방 식물이 혼재하고, 한반도 동부와 서부의 지형과 기후에 적응한 식물군들이 함께 서식한다. 진흙으로 된 늪의 피부는 연약하지만 그 깊이는 묵직하고, 품은 아늑하다.

 

용늪이시여, 다음 뵈올 때까지 옥체 보전 하소서

갑자기 안개와 비바람이 들이닥치곤 하는 고지대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용늪 구간을 돌아 나와 1.5km를 더 산행하면 대암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다. 가파른 바위 사이를 올라가다가 불현듯 지뢰지대 팻말이 옆으로 보인다. 철조망 위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가 갑자기 분위기를 을씨년스럽게 만든다. 용늪의 고요한 풍경이 남긴 여운에 취해 있다가 문득 이곳이 DMZ 접경지역임을 새삼스레 상기한다. 대암산과 인근 대우산은 한국전쟁 당시 양측이 험준한 산악 지형 속에서도 산봉우리 몇 개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혈전을 벌였던 곳이다. 과거엔 이 대암산과 용늪의 아름다운 풍경이 끝내 점령하고 수복한 아군 승리의 전리품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용늪 주위에 서식하는 산양 (사진 제공: 환경부 보도자료, 2010.08.02.)
용늪 주위에 서식하는 산양 (사진 제공: 환경부 보도자료, 2010.08.02.)

다시 땀을 내며 오른 대암산 정상에선 거대한 대접 안에 들어선 땅처럼 보이는 해안면의 분지, ‘펀치볼(punch bowl)’의 전경이 가득 펼쳐진다. 양구 을지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펀치볼’이 개미가 돼 깊은 사발 모서리 위에 올라선 듯한 느낌이었다면, 여기서 본 그것은 거대한 소쿠리 같다. 다시 발걸음을 되돌려 출발 지점인 탐방안내소로 내려올 때는 올라갔던 길과 다른 북동쪽 탐방로로 하산한다. 갈림길인 삼거리에서 다시 길을 되밟아 나오면 왕복 약 10.5km, 5시간 30분의 생태탐방 코스가 완료된다. 

용늪에 한 번이라도 와본 사람들은 알게 된다. 왜 만물이 약동하는 봄에서 대지가 무르익는 가을까지만 출입허가증을 발급하는지, 5천원의 입장료를 미리 납부하고 귀찮은 신청 절차를 거치는 것쯤이야 여기 또 오고 싶은 마음에 비하면 왜 아무 것도 아닌지, 청신한 자연은 왜 조금 불편하게 마주하는 게 더 좋은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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