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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수학 '기하' 제외... 시대 흐름 역행 vs 기우
수능 수학 '기하' 제외... 시대 흐름 역행 vs 기우
  • 양도웅
  • 승인 2018.03.12 11: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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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범위 발표 후폭풍

“수험생의 학습 부담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지난달 28일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 출제범위를 발표하며 교육부(부총리 및 장관 김상곤)는 이렇게 밝혔다. 교육부는 정책연구, 학부모·교사·장학사·대학교수·관련 학회 대상 온라인 설문조사, 17개 시도교육청 의견 수렴, 2021학년도 수능 출제범위 공청회 결과 등을 종합해 이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하지만 발표가 있기 전인 지난달 19일 서울교대에서 열린 공청회에서부터 수능 출제범위와 관련된 논란은 불거지기 시작했다. 대학의 공학계열로 진학할 학생들이 선택하는 ‘수학 가형’에서 「기하」를 제외하겠다는 입장을 교육부가 이 자리에서 밝혔기 때문이다. 

공청회 직후, 대한수학회(회장 이향숙, 이화여대)를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는 교육부의 이번 결정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단적으로 말해 「기하」를 수능 시험에서 제외하는 것은 ‘시대 흐름에 역행한다’는 것이다. 

범위를 줄이면 학습 부담은 줄어들까

이번 교육부의 결정과 관련해 가장 먼저 짚어봐야 할 것은 ‘범위를 줄이면 학생들의 학습 부담 또한 줄어드는가’이다. 이에 대해 홍진곤 건국대 교수(수학교육과)는 “범위를 줄인다고 해서 학생들의 부담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홍 교수는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줄이기 위해 교육당국은 10년 넘게 출제범위를 줄여왔지만,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의 학습 부담은 줄어들지 않았다”라고 덧붙였다. 출제범위를 줄이는 것만으로 현장에서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하기란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 학습 부담을 완화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홍 교수는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완화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학생들의 학습량을 줄일 것이 아니라 시험을 좀 더 쉽게 내면 된다”라고 말했다. 시험의 난이도를 조정하는 것이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실질적인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홍 교수의 주장은 항상 ‘변별력’이라는 난관에 부딪힌다. 이 우려에 대해 홍 교수는 “수학으로만 학생들을 변별하는 관습에서 벗어나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학생들의 학습량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출제범위, 그리고 시험의 난이도와도 관련이 있지만, 사회에 진출할 때 상대적으로 좋은 인상(혹은 점수)을 받을 수 있는 주요 대학의 입학정원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평가기준이 지나치게 ‘대학 이름(간판)’에 치우쳐져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고려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교육과 평가 시스템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일러스트=돈기성
일러스트=돈기성

기하와 4차 산업혁명

한편 대한수학회는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한 시대에 「기하」를 수능에서 제외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결정이라고 지적했다. 「기하」는 공간과 방향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학문일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과정에서 공간과 방향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과목은 「기하」가 유일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기하」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에 「기하」를 배우는 학생들과 가르치는 교사들 모두 부담스럽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이 회장은 “현재의 「기하」는 과거의 「기하와 벡터」라는 과목에 비해 분량 면에서 30% 이상 줄어든 상태”라고 반박했다. 뿐만 아니라 “현재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기하」는 과거에 비해 난이도 면에서 많이 낮아진 상태다”라고 말한 뒤, “「기하」를 시험에 포함시켜도 학생들이 충분히 잘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동중 고려대 교수(수학교육과) 또한 “「기하」를 제외하는 것은 상상력, 시각화 하는 능력이 중요해진 4차 산업혁명 시기에 적합하지 않은 결정이다”라고 지적하며 “이번 방침은 학생 개개인의 다양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다”라고 덧붙였다. 학습 부담을 완화한다는 명목 하에 출제범위를 축소한 결정의 이면에는, 학생들의 가능성과 다양성을 획일적으로 한정 지으려고 하는 사고방식이 존재한다는 비판이다. 이건우 서울대 교수(기계항공공학부) 또한 “「기하」를 통해 4차 산업혁명에서 필요한 사고력을 일찌감치 기를 수 있다”라고 말했다.   

반면 이번 교육부의 결정에 긍정적인 입장을 내놓고 있는 수학 교사 출신의 한 시민단체 대표는 “어떤 사람도 정확하게 4차 산업혁명이 무엇을 원하는지 말하지 못한다”라고 입을 뗀 뒤, “오히려 4차 산업혁명의 주요 기술이 빅데이터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4차 산업혁명에 적합한 과목은 「확률과 통계」다”라고 덧붙였다. 또한 그는 「기하」를 가르칠 경우, 실질적으로 학생들은 각 과목마다 두 권씩 있는 EBS 교재(‘수능개념’과 ‘수능특강’)를 고3 1년 동안 풀어야 하기 때문에, 고2 1년 동안 수학만 다섯 과목을 배우게 된다고 말했다. 「기하」를 포함시킬 경우, 아무리 이과 학생이라 하더라도 수학‘만’ 공부하게 된다는 것이다. 수학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이 회장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빅데이터를 분석하는 기술은 매우 중요한데, 미국에서 개발된 TDA(Topological Data Analysis) 소프트웨어는 그 정확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라고 말한 뒤, "이 기술이 바로 위상수학, 즉 공간의 수학적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에 기초해서 만들어진 것이며 대학에서 배우는 위상수학은 바로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기하영역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만큼 기하의 영향력이 현대사회에서 매우 크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교육부가 성공할까

이처럼 다양한 견해 차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교육부의 입장은 명확하다. 이에 대해 이건우 교수는 “지금도 고등학교 때 물리나 수학 과목 중의 특정 과목들을 학습하지 않은 학생들로 인해 교수들과 해당 학생들 모두 다소 애를 먹는 상황이긴 하다”라고 말했다. 이향숙 회장 또한 “교육부가 앞으로 「기하」를 가르쳐야 할 대학들과 충분한 상의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덧붙였다. 수능에서 「기하」를 제외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기하」를 가르치게 된 대학의 입장을 교육부가 충분히 반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려와 지적에 대해 교육부는 “「기하」가 일반과목(수능 출제범위에 포함되는 과목)에서 진로선택과목으로 이동했다고 해서, 고등학교에서 「기하」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더군다나 대입에서 수능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적어지고 있고, 주된 평가요소가 ‘학교생활’인 학생부종합전형의 비중이 커져가는 추세”라며 “대학들이 「기하」를 학습한 학생들을 원하고 학생들도 「기하」를 학습하길 원한다면, 고등학교 교실에서 「기하」는 여전히 주요 과목일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수학 및 공학 관련 대학교수들이 보이는 우려가 다소 지나친 감이 있다는 것이다. 

교육부의 이번 「기하」 제외 발표와 이에 대응하는 대한수학회의 풍경은 어딘가 낯설지 않다. 교육부가 지난 2005학년도 수능부터 ‘미적분’을 출제범위에서 제외하겠다고 발표함으로써 벌어진 장면과 겹치기 때문이다(현재 문과는 미적분을 배우고 있다). 현재는 대한수학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의 반발에도 「기하」 제외 발표 역시 미적분 제외 발표의 길을 따를 것으로 보인다. 

미적분이 제외된 이후 문과 학생들의 학습 부담이 완화됐느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일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적분을 공부하지 않아 창의적인 학생들이 나오지 않았느냐는 물음에도 고개를 끄덕일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출제범위에서 「기하」를 제외하기로 한 이번 결정은 어떨까. 과연 이번에는 교육부가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완화시키는 데 성공할까. 교육부의 결정에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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