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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잡힌 악령'이 일군 미학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사로잡힌 악령'이 일군 미학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8.03.12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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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 ‘성추행 문인’ 작품 교과서에서 삭제한다는데

예술가의 삶이 작품의 무게를 결정할 수 있을까. 오래된 이 논쟁적인 질문은, 지난 8일 교육부(부총리 겸 장관 김상곤)가 사회 곳곳으로 확대되고 있는 미투 운동과 관련된 문인들의 작품을 수록 교과서에서 ‘수정·삭제’하는 것으로 발 빠르게 방침을 발표하면서, 최소한 한국사회에서 한 작가의 삶이 작품에 앞서는 것으로 ‘결론’ 났다. 성추행, 성폭행 의혹이 제기된 고은 시인, 오태석·이윤택 연출가의 작품과 인물소개를 수록한 2018학년도 사용 중고등 검정교과서 40건을 100% 수정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미투 운동의 불길이 커지자 교육부는 지난달 검인정교과서협회에 공문을 보내 논란이 된 인물들의 작품을 수록한 교과서 발행 출판사들에 이들의 저작물과 인물 소개에 대해 수정 여부, 수정 계획, 수정예상시기를 물었다. 출판사들도 빠르게 응답했다. 미래엔이나 좋은책, 신사고 등은 작품을 교체하기로 했고, 지학사, 비상교육, 천재교육 등은 작품 및 인물 소개를 수정하거나 삭제하는 쪽으로 정리했다. 당초 수정·삭제 계획이 없던 상문연구사와 해냄에듀도 지난 7일 수정 대열에 합류했다. ‘국민적 공분’의 대상이 된 문인들의 작품은 불과 한달여 만에 교과서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교육부 교과서정책과의 이지은 교육연구사는 “교육부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나 한국창의재단 같은 검인정기관에 검정업무를 위탁했기에 교과서의 내용에 대한 수정·삭제를 요구할 수는 없다”며 “검인정교과서는 발행사와 저자가 저작권을 갖는 사적 저작물이긴 하지만 교육공공재로서의 성격도 갖기 때문에 사회적 논란이 제기된 부분에 한해서 책임 있게 대처하는 일환으로 이번 발표를 했다”고 밝혔다.

작품 문제가 아니라 작가의 삶이 汚點으로 얼룩져 빚어진 이번 교과서 작품 삭제 사태는, 신속한 ‘수습’ 속에서도 한국사회의 성숙이라는 정신적 지향점을 곱씹어볼 수 있는 계기를 던져준다. 그래서일까. 학계 역시 ‘성범죄’ 가해자로 지목된 작가들의 작품을 교과서에서 ‘신속하게’ 삭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국민감정이니 이견이 있을 수 없다’는 일반론에서부터 ‘현대판 焚書坑儒’라는 지적까지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고 있다. 

하지만, 교수들은 좀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첫 번째, 문제 인사들의 글이나 작품을 논란이 있을 때마다 교과서에서 삭제했나? 두 번째, 삭제한다면 일관된 기준은 글인가, 작품 외적 조건인가? 세 번째, 그렇다면 교과서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나?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과)나 송희복 진주교대 교수(국어교육과)는 삭제에 동의한다. 김 교수는 “문학과 예술도 크게 보면 사회가 맑고 밝은 데로 나아가기 위한 몸부림의 일환이라 생각”한다며 “시인들 사이에서도 도덕적 반감을 산 저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송 교수 역시 “삭제는 국민감정 아닌가. 이견이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황해문화> 편집주간을 맡고 있는 김명인 인하대 교수(국어국문학과)는 ‘어려운 문제’라고 입을 뗐다. “친일, 독재찬양의 시인 작품도 다 삭제해야 하겠고 모든 수록작가의 생애를 전수조사해서 유사 범죄사실이 있으면 전부 삭제해야 한다는 논리적 결론이 나온다. 심증과 혐의는 충분하나 아직 최종평결이 난 사안도 아니고 무죄추정의 원칙도 있다. 교과서 삭제는 너무 성급한 논의 아닌가?” 이어 그는 “작가는 범죄자여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도덕가일 수도 없다. 그의 삶과 문학은 분리될 수 없으나 그의 좋은 작품은 그의 구차한 삶을 초월하기도 하는데, 그게 문학, 예술의 힘”이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작품 삭제는 관련자들의 성범죄를 단죄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라며 “교과서에 수록하되 그 삶의 오점도 함께 가르치는 국어시간이 바람직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손종업 선문대 교수(국어국문학과)는 대중적 조치를 넘어설 것을 고민했다. “교과서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삭제를 통해 한 사회의 도덕적 선택과 배제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하지만 ‘눈 가리고 아웅’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 시와 시인의 삶의 관계성, 윤리성과 예술의 연관성, 문학성과 미투의 의미 등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이렇게 감정적인 방식으로 해소하는 게 꼭 올바른 길일까? 지워야 할 타당한 규칙이란 건 뭔가 싶기도 하다. 가령 서정주는 남기고 고은은 지우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고 본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수는 “동시대의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천재성과 예술성, 광기와 폭력을 균형 있게 이해해야 하는데, 문제와 논란이 생길 때마다 빼버린다고 수습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라고 따지면서, “이번 사태는 교과서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줬다. 더구나 교육부의 사태 수습 과정에는 깊은 고민이 결여됐다.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부분에 대한 충분한 논의 과정 없이 출판사들에 공문을 보내 수정 여부를 물은 건 ‘논란’을 회피하려는 것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들의 주장은 작품 자체에 대한 예술적 평가와 동시에 작가의 반민족성이나 비윤리성에 대한 엄중한 비판도 서술되고 교습돼야 마땅하다는 지적이다. 더 나아가 파국과 일탈, 부도덕을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교육적 가치를 생각해 본다는 점에서는 이번 사태를 ‘교과서란 무엇인가’까지 연결시켜 고민했어야 한다는 문제제기다. 미투 운동의 본질이 한국사회의 ‘성숙’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이듯, 한 작품의 삭제 여부의 기준에 대한 고민도 사회적 성숙을 엿볼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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