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로 자택에서 함석헌 부부 / |
나는 오래 전부터 함석헌을 원효에 비유해보곤 하였다. 내가 원효를 깊이 알아서가 아니라 한참 젊은 나이에 읽은 李光洙의 '元曉大師'라는 소설에서 그려져 있는 원효대사의 인품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요석공주의 간절한 짝사랑이 왕의 배려로 이루어지는 원효의 파계는 원효대사 일생의 절정을 이루는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파계 첫날을 치른 후 "이만하면 이대로 일겁을 살고 싶소"라고 당시의 심정을 고백한 원효는 사흘되는 아침에 공주가 정성껏 지어준 비단옷 벗어버리고 까실한 베옷으로 갈아입고 "벌써 몇겁이나 지났소"라며 "일겁만 더 누릴 수는 없으시오?"라고 애절하게 바라보는 요석공주를 물리치고 요석궁을 떠난 원효는 '파계승'이라는 자책을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그의 위대한 일생을 이루어 나간다.
"세상에서 그어논 금을 내가 깨뜨렸던 것이 잘못이지. 남의 가슴 아프게 했던 것이 내 죄지"라고 5년이 지난 후에도 현대의 파계승 함석헌도 한없는 자책을 되풀이하면서도 그가 그렇게도 즐겨 암송하던 王陽明의 시 '昨夜月明峰頂宿 殷殷雷聲在山麓 曉來却問山下人 風雨三更권 屋'을 되풀이 외면서 그의 일생을 싸워 나간다.
그 당시에 예고없이 나의 돈암동 집에 들어서신 함 선생님을 안방에 모시고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시던 선생님께 무슨 말씀을 드렸더니 "그래도 그렇게 나를 믿어주는 친구 때문에 내가 살아 나가지"라고 말씀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 때의 선생님은 마치 실성한 사람의 모습이었다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그 무렵 날 시퍼런 칼을 가지고 앱비슨관에 등단하신 일요집회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아 아버님이야 참 행복하신 분 이셨지 김교신이나 나나 그 점에서는 완전히 실패한 사람들이야"라며 나의 친구 송석중에게 잉꼬부부로 유명했던 송석중의 아버지 송두용 선생을 부러워 하셨다는 송석중이 나에게 들려준 말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송석중은 함 선생님의 결혼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평탄한 평양고보 학생시절에 가혹할 만한 사건이 있다면 열일곱살 때 한 살 아래인 황덕순과 결혼한 일이다. "전혀 부모님의 의견에 따라 했습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장자였음으로 결혼하는 일이 어머니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어른들의 의견에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해놓고 그는 오래지 않아 후회하게 된다. 신부가 시집오는 날 함석헌은 공부에 결석하기가 싫어서 신부 혼자 오라고 했다. 공부에 열심이었단 만큼 결혼에 열정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지 않을까? 이지적이면서도 감수성이 예민한 함석헌이 글도 배우지 못한 시골 색시와 결혼하고 나서 적지 않이 고민했을 것이다. (함 선생님 사모님은 일생을 문맹으로 마치셨기 때문에 선생님의 글을 한 줄도 읽지 못하셨다는 사실은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즐거웠어야 할 신혼부부의 잠자리가 눈물로 젖었다는 것은 참 불행한 일이다. "두해 동안 우리는 잠자리에서 같이 운 적이 많았읍니다"고 그는 말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눈물을 흘리는 일은 보통 슬픈 감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신랑 신부가 슬퍼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으니 다른 진단이 필요하다. 사람은 분할 때도 울고 억울할 때도 운다. 또 불만스러울 때도 불쌍한 사정에도 눈물을 떨어뜨릴 수 있다. 동정의 눈물이다. 아내는 남편의 생각을 몰라서 답답해 울었다면 그 일이 가여워서 남편이 따라 운 것은 아니었는지? 또 다른 번민이 있어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르나 이제 와서는 말없는 그들의 심정을 알아차릴 도리가 없다. >
장기려 박사님의 '나의 이력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함 선생은 최근에 "하나님 곁으로 가는 날이 가까워진 기쁨", "늙어서 아내의 똥 오줌을 받아 내주는 기쁨"등을 요즘의 낙으로 삼는다고 들었는데 나도 늙어서 별로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은 다소의 기쁨이긴 하나 그러나 죽었을 때 물레밖에 안 남겼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
언젠가 원효로 4가 선생님 댁을 방문하였던 일이 있었다. 건너 방에 홀로 원고를 쓰고 계셨던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대단히 듣기 거북한 신음소리가 들려와서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으니 "내버려 두시오. 가끔 버러지요"라고 말씀하시던 선생님의 평안한 음성을 기억하고 있다. 오랜 병에 효자 없다고 돌보는 자손들도 아무도 없는 안방에 반신불수로 언어장애까지 겹친 사모님이 때로 내뱉는 고함소리였던 것이다. 선생님보다 12년 앞서서 9년간의 와병 끝에 1978년 5월 8일에 숨을 거두신 황정순(黃貞順)여사를 추모하면서 부인께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 광주에 있었던 함선생님은 1930년 5월 9일 남강 이승훈 선생님이 돌아가신 일을 회고하면서 "그러나 그는 그렇게 순종, 봉사를 했는데 나는 그에 대해 성실을 지키지 못했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나를 치시지 않고 그를 치셨읍니다"라고 마지막 사과를 아내에게 바치고 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할 수 없지만 함 선생님의 조카벌되는 조순명이라는 사람이 당시 민주화 운동 선봉에서 주야장천 사자후를 토하고 있는 함석헌을 마치 희대의 색한이나 되는 듯 당시 정보기관의 후원까지 받아가며 함 선생님을 비난하는 야한 '거짓예언자'라는 책 한 권을 출판하여 화제를 모은 일이 있었다. 이 책을 낸 출판사는 이 책으로 일확천금을 노려 초판을 5만부나 찍었다는 데 당시 시민운동으로 이 책의 불매운동이 벌어져 이 책은 서점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와 같은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불매운동을 일으킨 젊은이들에게 고마움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시던 함 선생님의 모습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1982년 12월 4일에 미국 퀘이커인 이행우님에게 하신 편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나 개인으로는 좀 시끄러운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는 큰 걱정 없습니다. 내가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로 하고 사는데는 이변이 있을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거꾸러뜨리려는 악은 내 육체를 상대하여 장난할 뿐이지 내 신앙을 어떻게는 못할 것입니다. 찬송가에 있는대로 "내 명예와 재물과 생명을 원수가 빼앗은들 상관이 무어냐? 내 주께 항상 있으리로다" 그대로입니다. >
선생님의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1'이라는 글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나온다. (전집 4:201)
<내가 퀘이커 모임이 회원이 된 이후 옛날의 신앙 친구들로부터 "왜 퀘이커가 됐느냐?" "정말 됐느냐?"하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싱긋이 웃고 맙니다. 옛날 중국 시인 두보(杜甫)의 시구에 <問汝何事樓碧山 笑而不答心自閑>이란 것이 있습니다. 서울을 마다하고 두매산골에 와 사는 시인을 보고 너는 어째서 번화한 서울을 버리고 이런 궁벽한 산골에 와 사느냐 묻지만 자기는 싱긋 웃을 뿐이지 대답을 하지 않는다, 대답 아니하는 것은 내 마음이 스스로 한가하기 때문이다 …. 퀘이커가 됐음 어떻고 아니됐음 어떻읍니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대답아니하는 것 혹은 못하는 것이 정말 내 대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제 말 그대로 완전히 자유를 되찾은 퀘이커 함석헌을 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