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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 모토지로 헌병대장, 러시아 파괴공작 수법 조선에 적용했다
아카시 모토지로 헌병대장, 러시아 파괴공작 수법 조선에 적용했다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8.03.05 11: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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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 보고서 입수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원장 조화순)은 지난달 22일, 한국연구재단 토대연구사업(연구책임 이종수)의 일환으로 항일정보활동 관련 자료를 찾던 중, 일제강점기 초대 한국주차 헌병대장이었던 아카시 모토지로가 작성한 제정 러시아 파괴 공작서를 입수했다고 밝혔다. 

아카시 모토지로 헌병대장은 러일전쟁이 촉발된 후 유럽에서 러시아 배후를 교란할  목적으로 제정 러시아 반정부 세력을 규합, 러시아 정부를 공격하는 공작을 전개해 러일전쟁의 일본 승리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국가관리연구원이 이번에 입수한 러시아 파괴공작서는 러일전쟁이 끝난 후 일본군 육군 참모차장에게 복고한 공작결과 복명 보고서다. 보고서 표지에는 「洛花流水」라고 기록해놓아 표지만 보고서는 그 내용을 유추할 길이 없었다.

이 보고서는 중일전쟁(1937년) 직후 세워진 일본 육군 나카노 학교의 교재로 사용됐다. 나카노 정보학교 제1기생 교육을 담당했던 아키쿠사 슌 대령이 일본 육군참모본부 창고에 방치돼 있던 「낙화유수」를 발견, 나카노 학교의 기본교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카시 모토지로가 나카노 학교 학생들의 롤 모델이 된 계기다.

러일전쟁 직후 일본으로 돌아온 아카시 모토지로는 곧 초대 한국주차 헌병대장으로 부임했다. 아카시는 제 러시아 파괴공작에 써먹던 공작수법을 한국침략에 원용했다. 헌병보조원 제도를 만들어 1907년 군대 해산 후 방황하고 있던 한국군인, 의병투항자 등을 규합해 이들에게 의병수색, 민정정찰 등의 반민족적 임무를 부여했다. 이 과정에서 의병 1만4천500여명이 희생당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는 의병진압의 공을 인정받아 한국 주차군 헌병사령관으로 승진하고 경무총감까지 겸임하면서 헌병경찰을 일원화시켰다. 경무총감이 된 아카시는 헌병보조원 제도를 모방한 순사보 제도를 만들어 독립운동 탄압에 앞장세웠다. 한일병합 직전에는 일진회 등 친일단체를 만들어 한일병합을 건의하도록 배후조종하고 민족진영에 대해서는 회유와 협박으로 조직을 분열시키는 등 정치공작을 일삼았다.

또한, 각 지방의 헌병대와 경찰관서에서 식민통치에 필요한 비밀정보를 수집하여 중앙본부에 보고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때 구축된 경찰정보체계는 그 후 일제 패망 때까지 30여년간 식민통치에 가장 유용한 자료로 활용됐다.
국가관리연구원 측은 “최근 아베 일본 총리가 전쟁이 가능한 나라를 꿈꾸며 하나하나 법령을 정비해 나가고 있다. 전쟁이 가능한 나라가 완성되는 그날 일본의 군부는 100여년전 아카시가 기록한 공작보고서들을 검토하며 새로운 환경에 맞는 침략계획을 세울 것”이라며, 아카시의 보고서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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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철 2018-11-19 12:13:45
경각심에 눈이 번쩍 뜨이는 좋은 기사를 이제야 읽었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