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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학은 근대 사상인가, 전근대 사상인가? 
주자학은 근대 사상인가, 전근대 사상인가?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8.02.26 1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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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동서 문명과 근대’_ 제6강 이상익 부산교대 교수의 「동양의 근대-주자학적 전통」

네이버 ‘열린연단’의 다섯 번째 강연 시리즈 ‘동서 문명과 근대’가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번 강연은 동서양 근대성의 한계와 가능성을 비교문화적 관점에서 검토하는 취지에서 기획됐으며 2018년 총 50회 강연이 예정돼 있다. 이상익 부산교대 교수(윤리교육과)의 「동양의 근대-주자학적 전통」 발표 중 주요 부분을 발췌해 소개한다. 

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지난 세기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은 문화적ㆍ사상적 관점에서는 ‘유교 특히 주자학으로부터의 탈피’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동안 우리 사상계에서는 유교와 주자학을 ‘전근대적 봉건사상’으로 규정하는 입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유교에 대한 인식도 다시 변하고, 주자학에 대해서도 근대 사상이라는 관점에서 조명하는 학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근래에 들어 유학 또는 주자학이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을 뒷받침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주자학은 근대 사상인가, 전근대 사상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근대성(modernity)’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근대성’에 대한 정의는 학자들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본고에서는 ‘개체주의’와 ‘욕망의 해방’ 그리고 ‘합리주의’와 ‘구성주의’를 근대성의 핵심으로 설정한다. ‘개체주의’란 ‘보편적 이념이나 전체적 질서’보다 ‘개체의 주체적 신념이나 권리’를 중시하는 것으로서, 사회적 차원에서는 ‘개인주의’로, 국제적 차원에서는 ‘민족주의’로 나타난다. 전체적 질서를 자연스럽게 확보하려면 모든 구성원들이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이념이 전제돼야 하고, 경우에 따라 개인의 권리를 제한해야 한다. 그런데 근대 사회에서는 한편으로는 개인의 주체적(주관적) 신념을 절대화하고, 한편으로는 개인의 권리를 절대화한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라는 관념이나 ‘침해할 수 없는 기본적 권리’라는 관념이 그것이다.

‘욕망의 해방’은 ‘개인의 자유’와 表裏를 이룬다. 전근대에는 전체적 질서를 강조했기 때문에 개인의 욕망에 대해서 억압적이었다. 근대에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강조하는바, 그것은 바로 개인의 욕망을 마음껏 충족시킬 수 있다는 자유와 권리였다. 근대는 ‘개인적 자유’와 ‘물질적 쾌락’을 숭상하는 시대이다. 본래 전근대의 哲人들은 개인의 자유와 전체적 질서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물질적 쾌락보다는 욕망을 극복했을 때 얻어지는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도록 가르쳤다. 유교의 ‘安貧樂道’, 불교의 ‘涅槃寂靜’, 기독교의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 스토아학파의 ‘아파테이아(apatheia)’나 에피쿠로스학파의 ‘아타락시아(ataraxia)’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대개 행복을 욕구를 충족했을 때 얻어지는 ‘만족감(쾌락)’으로 규정한다. 행복의 정의 문제는 행복의 실현 방법과 직결된다. 행복을 ‘마음의 평화’로 정의하면 과감하게 욕망을 극복하는 것이 행복의 길이며, 행복을 ‘만족감’으로 정의하면 부지런히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행복의 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옛 성현들은 ‘克己復禮’를 권했던 것이요, 근대의 선구자들은 ‘이기주의(자유경쟁)’를 권했던 것이다. 극기복례는 개인의 자유와 전체적 질서가 조화를 이루는 길이나, 이기주의는 전체적 질서와는 상반되는 길이다.

이상익 부산교대 교수. 사진 제공=네이버문화재단

 

다음으로 ‘합리주의’에 대해 살펴보자. ‘근대의 합리화’란 우리의 삶에 ‘理性’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이성의 활용에는 두 측면이 있다. 첫째는 ‘이성적 인식(認識)’으로, 주술적·신비적 태도에서 벗어나 생활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질병을 마귀나 ?魂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기도나 굿을 하던 것을 바꾸어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둘째는 ‘이성적 計算’으로, 최소의 노력(고통)으로 최대의 효과(쾌락)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근대적 효율성의 관념이다. 효율성의 관념은 두 측면에서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하나는 과학 기술에 의해 뒷받침되는 상공업 중심의 사회를 초래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기존의 명분론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사회를 경쟁의 체계로 재편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구성주의’에 대해 살펴보자. 전근대를 지배한 自然法은 直觀主義에 입각한 것이나, 근대를 지배하는 契約法은 構成主義에 입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연법은 ‘발견’된 것이요, 계약법은 ‘구성’된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이러한 변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그때까지 자신이 몸담고 있던 다양한 사회적 질서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온 인간은 바야흐로 그들의 질서의 성립과 改廢가 그의 사유와 의사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게 됐다. 질서‘에 따라’ 행위했던 인간이 질서‘에 대해’ 행위하게 된 것이다.”

마루야마는 직관주의에서 구성주의로의 변화를 ‘인간이 질서에 대해 주체성을 확보해가는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근대성의 핵심으로 규정했다. 이제 인간은 ‘자연의 理法’이나 ‘神의 섭리’ 등 기존의 모든 질곡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신의 의사와 판단에 따라 사회를 만들고 자신의 삶을 가꿀 수 있게 됐다.

근대 사회에서 ‘개체주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권 사상으로 표출됐고, ‘욕망의 해방, 합리주의, 구성주의’ 등은 휴머니즘으로 표출됐다. 그런데 근대의 인권 사상과 휴머니즘은 明暗을 동시에 지닌다. 밝은 면을 보자면, 개체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신장시키고, 욕망의 해방은 풍요를 가능케 하며, 합리주의는 각종 부조리를 척결하고, 구성주의는 자신들의 의지에 맞는 삶의 양식을 창출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개체주의와 욕망의 해방은 혼란과 투쟁을 야기하기도 하고, 자원 고갈과 환경 오염을 야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합리주의는 ‘도구적 합리성’을 조장해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시키며, 구성주의는 상대주의와 ‘멋대로 자유’를 조장할 수 있다. 주자학은 위에서 소개한 ‘근대성’과 부합하는 면도 있고, 어긋나는 면도 있다. ‘개체주의(개인주의)’의 경우, 개인주의를 ‘개인의 이익 추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주자학적 입장과 크게 어긋나지만, 개인주의를 ‘개인의 주체성, 도덕적 자율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는 주자학적 입장과 훌륭하게 부합된다.

‘욕망의 해방’은 주자학적 입장과는 크게 배치된다. 주자학에서는 ‘욕망의 억압’도 반대하지만 ‘욕망의 해방’도 반대한다. 주자학은 인간의 욕망에 대해 말 그대로 ‘중용’을 추구한다. ‘합리주의’의 경우, 주자학은 ‘이성적 인식’과 ‘이성적 계산’을 모두 중시하지만, 이성을 욕망의 노예로 삼는 것 즉 ‘이성의 도구화’에 대해서는 배격한다. ‘구성주의’의 경우, 繼天立極을 표방하는 주자학은 직관주의와 가깝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구성주의와 직관주의를 지양하자는 것이다.

근래 우리 학계에서 주자학의 근대성을 가장 역설하는 학자는 김상준일 것이다. 그는 “지구상의 여러 문명과 사회의 평화로운 공존과 번영을 떠받칠 수 있는 문명적 잠재력은(…) 武斷的이고 專橫的인 권력을 비판적으로 제약할 수 있는 힘(비판성)과 이웃 및 공동체에 대한 윤리적 책무를 제도화할 수 있는 역량(윤리성)에 있다”고 해, ‘근대성의 정수’를 ‘비판성과 윤리성’으로 규정한 다음, “군주에게 요ㆍ순(堯舜)과 같은 완벽한 덕과 평화로움을 준엄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요청할 수 있는 자, 이들이야말로 자유인이 아니었겠는가. 요·순의 도를 이었다는 자부심, 즉 道統의 자부심을 내면화한 집단, 이러한 집단으로 군주를 포위했던 것이 유교 정치 체제였다”는 맥락에서 ‘주자학의 근대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근대성의 또 하나의 축은 ‘개인의 자유와 욕망의 해방’이었거니와, 주자학은 이러한 조류와는 분명 반대되는 것이다. 요컨대 ‘개인의 권리와 욕망의 해방’이라는 관점에서 근대성을 이해하면 주자학은 전근대적 사상으로 평가되나, ‘비판성과 윤리성’이라는 관점에서 근대성을 이해하면 주자학은 근대 사상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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