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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회학의 전위 에바 일루즈 “‘선택’은 문화적 건축이다”
문화사회학의 전위 에바 일루즈 “‘선택’은 문화적 건축이다”
  • 김건우 독일통신원/빌레펠트대 박사과정·사회학
  • 승인 2018.02.26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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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대학은 지금_ 낭만주의와 사랑의 사회학

지난 1일 오후 6시, 에바 일루즈의 강연, 「감정들과 선택의 사회학」이 있었다. 1시간 10분의 강연과 45분 동안 진행된 질의응답을 통해서 그녀의 ‘사랑의 사회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문화사회학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14년에 번역된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의 서문이 ‘낭만적 사랑’으로 시작하는 것처럼, 강연 역시 곧바로 ‘낭만적 사랑’에서 시작했다. 만하임은 낭만주의는 기본적으로 기존에 있던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사유하고, 그러한 자기정당화의 근거를 외부가 아니라 생동하는 자기 내부에서 찾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더 높은 수준의 근거를 자신의 내부에서 제시할 수 있는 능력, 즉 새로운 차원을 제시할 수 있는 주체의 반성능력을 그는 낭만적 주체의 이상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이는 비단 낭만주의나 낭만적 주체에 국한된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만하임의 이런 설명은 ‘낭만적’, ‘낭만주의’라는 규정으로 역사적인 대상을 설명할 때 요구되며, 또한 그 역사적이고 근대적인 현상의 무한한 다양성을 감당할 수 있는 이론적인 힘과 집요함에 대한 사회학의 정언명령으로 읽혀야 한다. ‘열정으로서 사랑’으로 또 다른 사랑의 사회학의 풍경을 펼쳐 보인 루만이 지적한 것처럼, 비정상적일 뿐 아니라 정상적인 비개연성인 사랑을 역사적으로 다룰 때에는 단순하게 개인적인 호감을 ‘낭만적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근대적인 사랑을 낭만적 사랑이라고 일반화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일루즈가 이 문제를 대면하고, 작업할 수 있는 사회학적인 개념이 바로 ‘선택’(choice)인 셈이다. 그녀는 경제학은 사람들이 어떻게 선택하는가에 대한 학문으로 시작했지만, 19세기 후반에 출현한 사회학은 사람들이 어떻게 선택하지 않게 하는가에 대한 학문으로 시작했다는 흥미로운 대비를 했다.

선택의 사회학과 감정자본주의

일루즈는 이러한 선택의 사회학을 ‘선택의 생태학’과 ‘선택의 건축학’ 개념으로 이론화하고자 했는데, 전자는 선택이 여러 대안들 중에 가능한지 그리고 그런 선택에 수반되는 위험과 그 조건을 더 많이 지각하는 것으로, 이는 선택의 경제학처럼 보다 일반적인 차원이다. 그녀의 용법을 빌리면 선택 자체가 소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여러 차례에 걸쳐 애정을 표시하고 강조한 것은 후자, 즉 ‘선택의 건축학’이었다. 그녀는 이를 간단히 “선택은 역사적 문화에 따라 다양하다”고 하면서 선택을 ‘문화적 건축’이라고 정리했다. 선택의 건축학은 선택에 대해서 스스로 그리고 자신이 속한 사회적 상호작용과 문화적 취향 안에서 어떻게 생각하는가의 문제까지 함축한 인지적인 차원을 설명하는 것이면서, 감정적인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서 일루즈가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의 부제인 “사랑과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을 통해 명시적으로 자신의 문화사회학에서 벨의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을 새삼 확인할 필요가 있다. 벨은 이 책에서 “문화는 감수성, 감정, 도덕적 기질 그리고 이러한 감정들을 질서지우고자 하는 지능(intelligence)의 영역이다”고 규정한다. 그녀는 벨의 용례를 이어받아 『감정자본주의』에서는 ‘감정지능’(emotional intelligence)이라는 새로운 사회학적인 범주를 창안한다.

그녀가 오늘날 주목받는 문화사회학의 전위들 중 한 명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사회학 이론의 고전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급변하는 경험적인 현실을 정확하게 조명하기 위해 사회학 이론의 개념도구들을 갱신해가는 능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론이 경험과 현실전환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고, 또 초월할 수도 없지만, 역설적으로 현실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기존 이론이 보유하고 있는 잠재력을 갱신해야 하는 것이다. 그 결과의 성취에 대한 판단과 별개로 일루즈는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 문화사회학자라고 적극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벨의 작업을 확장한 ‘감정지능’을 다루고 있는 『감정자본주의』 2장은 부르디외의 난공불락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장’과 ‘자본’ 개념까지도 확장한 ‘감정장’, ‘감정자본’의 제목이 붙어있다.

문화사회학의 이념과 전망

그러나, 이번 강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주장은 그녀가 ‘사회학적’이라고 명명한 것으로, “주체가 자신의 결정의 진리를 수립한다”는 테제였다. 그녀가 세 차례에 걸쳐 반복해서 말했던 저 문장이 이날 강연 제목이기도 한 ‘선택의 사회학’, 문화사회학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감정의 사회학의 이러한 이념에 따라 ‘선택의 건축학’의 위상이 결정될 것이다. 엘루즈는 『감정자본주의』에서 “감정자본주의는 감정적이고 경제적인 담론들과 실천들이 서로를 형성하고, 정서가 경제적 행동의 본질적인 측면이자 특히 중간계급에서 감정적인 삶이 경제적인 관계와 교환의 논리를 따르는 넓고, 전면적인 운동을 산출하는 하나의 문화다”라고 한 바 있다. “감정자본주의는 문화다”라고 할 때, 감정자본주의와 문화를 매개하는 작용들을 탐구하는 것이 그녀의 문화사회학이고, 이는 자신의 결정의 진리를 수립하고자 하는 주체들의 선택의 건축학이라는 메커니즘에 대한 해명에 다름 아니다. 그녀는 앞으로 사랑과 섹슈얼리티의 양상들에 대한 전망에 대해서, ‘pure supermarket of relationship’ 이 될 것 같다고 하면서, 남녀 간의 성적인 관계가 더욱 다양하고 일회적인 관계로 진화할 것인데, 이는 기본적으로 소비영역의 침투가 더욱 전면화 되는 것 뿐 아니라, 새로운 파트너와 새로운 관계의 결합과 재결합까지 설명하는 것이라고 했다.

철학자 만프레드 프랑크와의 설전

45분간 진행된 질의응답 때는 모두 7개의 질문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국내에 『현대의 조건』, 『신구조주의란 무엇인가』로 소개된 철학자 만프레드 프랑크의 질문이 있었다. 일루즈가 가장 곤혹스러워하고, 다소 짜증스런 반응을 보였던 순간이었다. 프랑크는 슐레겔과 헤겔에서 선택과 자유의 문제, 그리고 독일낭만주의에서 개인, 개인성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질문을 했는데, 듣고 있던 많은 청중들은 일루즈와 프랑크 간에 형성된 위태로움을 불안해하면서 지켜보았다. 그녀는 철학적인 교리문답에는 관심이 없었고, 또 프랑크의 질문에 답을 할 준비가 돼 있지도 않았다. 일루즈는 프랑크의 질문에 대해 자신은 사랑의 개념에 대해서 작업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서로에게 어떤 성적인 관계를 실천하고 있는지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러한 사회적 형식의 전환에 관심이 있다고 답했다. 또 프랑크의 질문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지만, 자신은 구체적인 내용과 역사를 갖는 문화의 사회적 형식에 관심이 있다는 답이 아슬아슬하게 건네졌다. 

그러고 보면,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로 국역된 책은 『낭만주의 소비』로 독역됐는데, 독일인들에게 ‘낭만주의’는 이들의 세계상, 인격성, 개인성, 주관성의 심연이자 고향이 아닐까 새삼 생각하게 됐다. 독일은 괴테의 나라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노발리스와 장 파울, 슐레겔 형제의 나라라고도 할 수 있으며, 여전히 칸트의 나라이기도 하지만 이는 피히테, 쉘링과 더불어 이해돼야 하는 칸트인 것이다.

질적인 강화와 더 나은 자기 동일화

낭만주의를 이론화하기 위해서는 “이 단어는 규정할 수 없는 무엇이지만, 중요한 현상과 거대한 운동을 다루는 곳에서는 규정되지 않는 단어보다 더 정확한 것은 없다”에서 시작해야할지 모른다. 슐레겔 식으로 말하면, 낭만주의는 불안을 고정화하는 것이다. 장 파울은 사랑을 사랑하는 것을 사랑에 대한 낭만적인 표상으로 보면서, 신학적으로 허가된 도덕으로부터 사랑이 분리된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같은 시대에 헤르더 역시 당대를 “세계 안에서 모두가 스스로를 자신의 신”이라고 하는 시대라고 보았다. 신학적으로 탈도덕화 됐다는 것은 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노발리스의 유명한 정식을 따르면 ‘세계를 낭만화’하는 것이다. 낭만화는 ‘질적인 강화’에 다름 아니며, 이 작업을 통해서 저급한 자기는 더 나은 자기와 동일화된다. 통속적이고 널리 알려진 것에 고상한 의미와 비밀로 가득한 모습을 부여할 때, 그렇게 알 수 없는 것의 위엄을 부여할 때, 유한한 것에 무한한 모습을 부여할 때, 노발리스는 이를 ‘낭만화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자기는 고전주의자 훔볼트가 말한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활동적이며 가장 자유로운 상호작용으로 세계와 결합하면서 도달하는 보편적인 인간성인 ‘우리의 나’의 자기와 다른 것이다. 완성을 향하는 보편적인 자기가 아니라, 노발리스의 자기는 세계를 낭만화하는 ‘강화된 나’다.

21세기에 사랑의 사회학은 노발리스가 말한 ‘강화된 나’를 조건으로 한다. 일루즈가 말한 “주체가 자신의 결정의 진리를 수립한다”는 문화사회학의 이념은 이를 보다 경험적인 차원으로 끌고 내려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루만 역시 사랑의 의미론과 관련해서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것으로 ‘세계에 열려 있는 동시에 고유한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이라는 신인본주의적-낭만주의적인 개념’이자, ‘사랑을 위한 사랑이라는 관념’이라고 지적한다. 불안을 고정화하는 시대일수록 사랑은 세계와 대면하면서 동시에 자기세계를 구축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내밀한 자신만의 세계를 요구하며, 자신의 법칙을 스스로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랑의 감정이든, 사랑에 대한 낭만적인 이념이든 그리고 무엇인가를 부정할 수 있는 자유는 일루즈가 말한 선택의 건축학으로서 사랑의 사회학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김건우 독일통신원/빌레펠트대 박사과정·사회학
칼 슈미트와 니클라스 루만의 국가이론과 공법이론을 비교, 종합하는 작업을 통해 민주주의와 국가의 내적인 연관을 사회학적으로 조명하는 국가사회학을 연구하고 있다. 루만의 저작 『근대의 관찰들』과 『체계에서의 권력』 등을 번역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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