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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학술하기
우리말로 학술하기
  • 이강재 서울대 중문학과
  • 승인 2018.02.26 11: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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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유네스코 사이트( http://www.unesco.org/xtrans/)에는 회원국에서 번역한 책을 집계해 발표한 ‘번역인덱스(Index Translationum)’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전 세계에서 다른 나라의 서적을 번역해 발간한 현황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검색을 통해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 통계자료가 몇 가지 점에서 아주 최신의 것을 반영하고 있거나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번역에 대한 여러 나라의 대체적인 현황을 알고자 할 때 도움이 된다.

번역대상이 된 언어(Original language)를 기준으로 볼 때, 영어로 된 서적이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 수량이 2위를 차지하고 있는 프랑스어에 비해 거의 6배에 달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전 세계적으로 과학기술을 비롯한 전 학문분야에서 영어의 영향이 가장 크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일본어가 8위, 중국어가 16를 차지하고 있어 아시아의 언어 중에서는 앞서고 있고 우리말은 29위에 위치하고 있다. 아쉬운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학문적 수준이 아직 세계적으로 앞서지 못하고 있거나 그나마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과학기술 관련 서적의 상당부분이 영어로 쓰인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듯하다. 또한 번역의 결과물로 나오게 되는 목표어(Target Language)를 기준으로 할 때 독일어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프랑스어를 차지하며 영어는 네 번째에 자리하고 있다. 일본어가 5위, 중국어가 13위이며, 우리말은 19위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경제규모에 비하면 학술 언어로서의 한국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볼 때 아주 높지는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새로운 문물이나 사조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번역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말이 번역의 대상어로서 가장 앞서간다면 더 바랄 것도 없지만 번역의 목표어로서도 위상이 높지 않다는 것은 학술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가 한국어로 사고하고 글을 쓴 역사가 실질적으로 1백여 년에 불과하다고는 하지만, 이제 우리의 학문은 기본적으로 한국어로 사유하고 한국어로 글쓰기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때 여기서 말하는 한국어로 글쓰기가 단순히 한글이라는 표기수단을 사용했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 사유의 결과로 표현된 말들이 우리의 현대적 언어감각에 맞는 것들이어야 하고 특정 전문가 집단만이 공유하는 것이 아닌 일반인들도 함께 할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동양의 고전을 전공하는 내 입장에서 번역하기와 글쓰기에서 조심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한문으로 된 문헌에 마치 토를 달아놓은 것처럼 보이는 번역, 그리고 번역문을 읽기는 읽었는데 그 자체로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려운 번역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번역의 대상인 한문의 해독능력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며 고전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다. 

근자에 출판된 조명화의 『논어역평(전2권)』(현암사, 2017)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은 크게 두 가지에서 출발한다. 첫째는, 중국이 다시 부상하는 현재 시점에서 과거 우리 사회의 표준으로 작동했던 중국의 문명에 대한 비평이 필요하며, 이는 ‘무거운 고전’인 『논어』를 통해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추상명사의 개념부터 시작하여 온전히 우리말로 번역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가 번역어에서 경계하는 것은, “한국어의 표현력이나 위상이 낮으면 한국어 사용자들은 불편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한국어 공동체의 위기나 다름없다”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또 “표현력 부족 때문에 읽히기 어려운 번역문도 있으나, 문장을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공자와 유학의 권위를 드러내려는 표현 때문에 읽기 어려운 번역문도 많다”라는 말에서 왜 『논어』의 번역을 통해 동시에 중국 문명의 비평을 하고자 하는지를 보여준다.

공자가 ‘好古’했다는 말은 전통적으로 “옛것을 좋아했다”라는 말로 쉽게 번역됐지만, 이럴 경우 여기서 말하는 옛것이라는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이를 조명화는 “고전에 몰두하기”라는 말로 번역한다. 이 말은 ‘好’와 ‘古’에 대한 깊은 사색의 결과 찾아낸 우리말일 것인데, 현재적 관점에서 “그래 바로 이 말이야” 하는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사실 나는 그동안 출판된 다수의 『논어』 번역서에서 자신만의 책은 전통적인 번역의 잘못을 극복했다는 말을 많이 보았기에 번역서의 서문에 보이는 그런저런 선언적 주장을 크게 중시하지는 않는 편이다. 또한 저자의 문제의식이 이 책에서 모두 해소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그것을 절대적으로 기대할 수도 없다. 그것보다는 이러한 문제의식 자체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것이며, 앞으로 우리 학계가 모두 노력하면서 함께 해결해야할 과제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뿐이다. 2046년이면 한글반포 600주년이 된다. 그때가 되면 우리나라에서 우리말로 학술하기가 정착돼 있어야 한다는 기대를 해본다.

 

이강재, 서울대 중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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