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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바쁘게 변하는 학과명에 대한 단상
[원로칼럼] 바쁘게 변하는 학과명에 대한 단상
  • 윤용호 고려대 명예교수·독문학
  • 승인 2018.02.26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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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호 고려대 명예교수·독문학

 

최근 내가 정년한 학과 교수들에게 새로 출간된 책을 우편으로 보내기 위해 학과 주소를 다시 한 번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학과 명칭이 바뀌어 있었다. 내가 정년할 때는 독일문화정보학과였는데 독일학 전공으로 돼 있었다. 내가 대학에 근무한 기간은 1984년부터 2009년까지 25년간이다. 1960년대에 독어독문학과에 입학해서 1980년대에 외스터라이히(영.오스트리아)의 비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와 25년간 교수생활을 했다. 이 짧은 기간에 학과 명칭은 독어독문학과에서 독일문화정보학과로 그리고 지금은 글로벌학부 독일학 전공으로 바뀐 것이다. 그야말로 소용돌이처럼 어지러운 변화를 겪어온 것이다. 

‘소용돌이처럼 어지러운 변화’라는 말을 하고보니 1970년대 어학과 문학에 대한 개념들을 공부하면서 겪었던 어지러웠던 순간들이 문득 떠올랐다. 물론 우리의 학과 명칭변화와 같은 의미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낱말개념에 대한 어지러웠던 기억은 지금도 뚜렷하다. 서독의 문학단체인 ‘47그룹’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오스트리아 출신 대학생 작가 패터 한트케의 문학에 대한 입장 때문이다. ‘47그룹’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하인리히 뵐과 귄터 그라스 같은 작가들이 있었다. 

이 그룹은 독일이 1945년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1947년 동서독으로 분단되었을 때를 기점으로 삼아 서독 문인들이 독일의 전쟁 범죄행위를 속죄하는 심정으로 조금도 속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쓰겠다는 공감대 속에서 만든 단체다. 그런데 이들의 문학을 한트케는 ‘서술 불능의 문학이며, 낡은 서술문학에서 성장한 것’이라고 했다. 또 문학이란 언어로 만들어진 것이지 그 언어로 서술된 사물들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쓰자는 47그룹의 주장은, ‘컴퓨터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라면 47그룹 작가들보다 백과사전이 훨씬 뛰어나다’고 하는 냉소적인 공격을 받고 1967년 사라지고 말았다. 쟁쟁했던 문학단체가 젊은 작가의 비난에 저토록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신기하긴 했지만 정확하게 이해하기에는 좀 어지러웠다. 

두 번째로 부딪힌 어지러움은 소쉬르의 언어에 대한 입장이었다. 나는 언어의 주된 기능을 세상에 있는 사물을 지칭하는 것이며, 낱말은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과 일치하는 상징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소쉬르는 언어를 사회 안에서 긴 시간을 두고 축적된 언어(랑그)와 그 일부를 빌려 쓰는 개인들의 언어(파롤)로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란 세상 사물과 아무 관계없는 기호라고 했다. 지금까지와는 너무나 다른 인식 변화를 강요받는 느낌이었다. 

현재 우리는 인문학적 사유에 따라 규정된 많은 개념들이 과학적 실증의 영향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수없이 보아왔다. 예를 들어 이전까지는 문학과 언어를 인간의 정서로 느끼고 감흥을 맛보았다면, 20세기 들어와서는 인간의 자리를 과학이 대신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문학(Literatur)과 언어(Sprache)에는 과학(Wissenschaft)이란 낱말이 부가돼 문예학(Literaturwissenschaft)과 언어학(Sprachwissenschaft)이라는 표현이 쓰인다. 문학작품을 감상하는 방법도, 독자의 대부분은 내용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를 펼치면서 감동을 주는 요인(상징)들을 찾느라 깊은 상념에 잠길 것이다. 용케 그런 장면을 찾으면 감탄사를 외치며 칭찬을 주체하지 못하지만,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없으면 뭐 이걸 작품이라고 하냐며 혀를 차게 된다. 

그러나 빌려 쓰는 언어로 문학이 만들어진다는 말에 동의한다면, 낱말(기호)들에서 내용을 보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이전의 수많은 작가들이 같은 낱말들로 같은 이야기들을 이미 수없이 서술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삶의 곳곳에 인문과 과학이 부딪히고 있음을 본다. 바쁘게 변하는 학과 명칭을 보면서 과학과 맞서거나 타협하면서 인문학적 사유와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후배 교수들에게 깊은 격려의 마음을 보낸다.

 

  윤용호 고려대 명예교수·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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