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적 윤리 문화의 융회(reconciliation)
유가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적 윤리 문화의 융회(reconciliation)
  • 윤상민
  • 승인 2018.02.20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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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동서 문명과 근대’_ 제5강 이승환 고려대 교수의 「자유와 공동체 그리고 덕과 권리」

네이버 ‘열린연단’의 다섯 번째 강연 시리즈 ‘동서 문명과 근대’가 시작됐다. 이번 강연은 동서양 근대성의 한계와 가능성을 비교문화적 관점에서 검토하는 취지에서 기획됐으며 2018년 총 50회 강연이 예정돼 있다. 이승환 고려대 교수(철학과)의 「자유와 공동체 그리고 덕과 권리」 발표 중 주요 부분을 발췌해 소개한다.

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김승환 고려대 교수.  사진 제공=네이버문화재단
이승환 고려대 교수. 사진 제공=네이버문화재단

우리는 자유주의의 논리만 가지고 이상적인 사회의 청사진을 그릴 수 없으며, 자유경쟁의 논리만 갖고 바람직한 인간상을 그릴 수 없다. 시장의 논리 그리고 자유경쟁에 의해 발생하는 실업 문제, 복지 문제, 인권침해, 교육 문제, 환경 문제를 도외시하고 어떻게 바람직한 인간상과 사회상을 그릴 수 있겠는가? 경제적 자유주의로 인해 심화되는 불평등이 빈자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시민들 사이에 상대적 박탈감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체제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사물화와 물신숭배 역시 바람직한 사회와 인간에 대한 희망을 가로막는 장벽이 된다. 탐욕을 추동력으로 삼는 시장 만능의 경제체제가 가치의 무정부주의와 만날 때, 인간관계는 더 이상 인격적 주체들의 관계가 아니라 사물들의 관계 또는 화폐의 관계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모든 가치가 화폐가치로 환산되므로, 부는 행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표 그 자체가 되며 이는 인간을 사물화의 길로 내몬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유나 권리라는 장치도 기껏해야 특정 계급의 이익을 옹호해주는 방패막이에 불과하게 되고, 권리는 개인과 개인을 화합시켜주는 대신 적대 관계로 만들어버린다. 개인들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보장된 사적 영역 안에서, 보다 고양된 형태의 가치를 추구하는 대신 소유권적 개인주의에 탐닉하게 된다.

준법적 이기주의자로의 안주

후기근대에 들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공동체주의의 목소리는 이렇게 소극적 자유의 보호막 안에서 최저한의 준법적 이기주의자로 안주하려고 하는 자유주의적 인간관에 대한 비판으로 평가될 수 있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소극적 자유의 보호막 안에서 삶의 목적과 가치관을 상실하고 표류하는 개인들을 자발적인 연대와 협력에 기초한 가치 공동체 안으로 귀속시킬 것을 주장한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가 지나치게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만 집착함으로써 공동체 안에서의 유대와 협력 그리고 미덕과 헌신 등의 도덕 가치를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무정형의 개인들을 다양한 공동체 안으로 귀속시킴으로써 자유주의가 안고 있는 빈곤성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공동체주의는 뿌리 없이 떠도는 ‘무정형의 자아’ 대신 안주할 만한 공동체에 소속된 ‘뿌리박은 자아’를 선호한다. 정처 없이 표류하는 무정형의 개인들을 가치의 공동체에 귀속시킴으로써 공동선을 위한 유대와 헌신을 이끌어낼 수 있으며, 덕과 인격의 배양을 통해 한층 바람직한 인간으로 도약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로 볼 때, 공동체주의에서는 구성원들로부터 최소 윤리(minimum morality)가 아니라 최대 윤리(maximum morality)를 권고하며, 윤리적 하한선에 머무는 준법적 이기주의자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최대한도의 고양을 추구하는 유덕자를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제시한다.

현대 공동체주의에서 말하는 공동체는, 전근대 시대에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단일한 종교나 하나의 거대 이념으로 조직된 전체주의적 사회가 아니다. 공동체주의는 자유주의 토양에서 자라나서, 자유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새로운 윤리 문화에 대한 희구에서 연유했다. 전근대 사회의 공동체가 지연이나 혈연에 뿌리박은 ‘비자발적 공동체’라고 한다면, 오늘날의 말하는 공동체는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만든 ‘자발적 공동체’이며, 획일적인 이념 대신 가치의 다양성을 승인한다. 공동체주의는 자유주의의 빈곤성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근대성에 대한 문명 비판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전근대 사회의 규범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재수용하려는 복고주의의 입장과는 확연하게 구별된다.

오늘날 공동체주의라고 부를 만한 다양한 논의들이 있지만, 공동체주의를 관통하고 있는 핵심은 자유주의가 지나치게 개인의 자율성과 분리성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공동체가 인간의 삶에서 가지는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동체주의에 의하면, 성숙한 인간의 존재양식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어서는 곤란하며, 참다운 자유는 자신을 타자로부터 고립시킴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동체 안에서의 연대와 협력을 통해서 실현 가능하다는 것이다. 공동체주의에 의하면, 자아 정체성은 진공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공동체 내에서의 실천(praxis)을 통하여 형성된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아의식을 갖는 개인들이 먼저 있고 사회적 관계가 뒤에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은 구체적인 공동체 안에서 항상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자라난다. 즉 자아는 사회적 원 사실이 아니라 사회화의 한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에서 출발점으로 상정하는 자아란 타자로부터 고립된 소속되지 않은 자아(unencumbered self, unembedded self, unsituated self)이며, 이러한 자아는 권리라는 보호막 안에서 아무런 ‘목적’도 없고 ‘성격’도 없는 그리고 ‘도덕적 깊이’마저 없는 익명의 개인으로 표류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소극적 자유만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사회에서 소속감을 잃고 표류하는 개인들을 바람직한 공동체 안으로 귀속시킴으로써 개인들을 ‘가치관의 아노미’와 ‘목적 없는 삶’에서 건져내자는 데 공동체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

물론 자유주의자들도 공동체주의자들의 비판에 대하여 나름 응수를 하고 있지만, 이들 사이의 논쟁은 결국 자유주의의 긍정적인 요소를 유지하면서 공동체주의적 가치를 수용하려는 절충적 입장으로 귀결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런 점에서 공동체주의자들의 견해는 자유주의에 대한 양자택일의 대안이라기보다는 자유주의가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 더 나은 인간과 사회를 만들기 위한 비판적 조언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절충적 입장은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극단적 공동체주의의 입장을 취한다면 우리가 자칫 전체주의의 늪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보장과 동시에 공동선의 추구라는 절충의 길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되며, 개인의 자유에 대한 보장과 동시에 자아의 실현이라는 조화의 길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즉 사회 전체로 볼 때는 부당한 억압이나 간섭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해줄 수 있는 자유주의의 장점을 수용하면서, 이러한 체계 안에서 가치관을 공유하는 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만든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를 장려함으로써 개인들로 하여금 적극적 자유를 실현하게 만들 수 있는 제3의 길이 필요하다고 보인다.

전근대/근대/후기근대적 요소가 혼재해 있는 한국 사회에는 덕/권리, 개인/공동체, 사익/공동선, 자기주장/조화로운 인간관계 등의 상이한 가치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다. 우리에게는 두 갈래의 선택지가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유주의가 지향해온 권리 중심의 윤리관을 채택하느냐 아니면 유가 공동체주의에서 지향해온 덕 중심의 윤리관을 되살리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가 처한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양극단 외에 다른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소극적 자유만을 강조할 때 개인은 외부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자율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지만, 고통받는 타자에 대한 배려나 바람직한 공동체의 수립에는 무관심하기 마련이다. 또한 적극적 자유만을 강조할 때 역사적으로 자주 보아왔듯 자칫하면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다. 배타적 소유권만 주장할 때 우리는 인정머리 없는 졸부가 되기 쉬우며,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미덕만을 강조할 때 우리는 충성스러운 노예로 전락할 위험도 있다. 우리는 과연 이 두 종류의 윤리관이 가지는 단점들은 버리고 장점만을 취합하여 새로운 윤리 문화를 창출해낼 수 있는 것일까?

이상적인 의미에서의 자유 즉 총체적 자유(total freedom)는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이 모두를 구성 요소로 한다. 아무리 개인이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하더라도, 1차적 욕망의 노예가 돼 있는 한 그는 자유롭지 못하다. 역으로, 아무리 개인이 자기 내부의 욕망을 잘 제어한다 하더라도, 쇠사슬에 묶여 있거나 굶주림에 시달리는 한 그는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자유란 외부의 간섭뿐 아니라 내면의 속박으로부터도 벗어나, 자신의 의사와 행위를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상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를 이처럼 규정했을 때, 우리는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왜곡된 자유와 규범적 아노미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한걸음 가까이 다가섰다고 할 수 있다. 총체적인 의미의 자유가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모두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 해방이란 부당한 권력의 억압이나 부조리한 경제구조의 착취에서 벗어난 정치ㆍ경제적 해방일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자기 내부의 절제되지 않은 욕망과 충동에서 벗어난 인격적 해방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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