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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부터 대한민국까지, "한국민족 악무의 精髓 담았다"
단군부터 대한민국까지, "한국민족 악무의 精髓 담았다"
  • 이민홍 성균관대 명예교수
  • 승인 2018.02.19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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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韓國民族樂舞史』 이민홍 지음 | 성대출판부 | 692쪽

필자는 20여년의 각고 끝에 ‘民族禮樂’과 ‘民族美學’ 그리고 선인들의 文‧史‧哲의 융합방법론에 입각해 한국과 중원의 방대한 사서와 악서를 섭렵해 『한국민족악무사』를 저술했다.

악무는 고대에 이어 중세와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와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 이는 동아시아 악무의 본령을 밝힌 『樂記』에 기록돼 있다. 악은 정치와 통하고 악무를 보면 그 나라 정치 상황을 알 수 있고, 태평시대와 어지러운 시대 및 망국의 악무가 있다고 했다(治世之音‧亂世之音‧亡國之音). 근현대 이전의 경우 현재의 악무개념으로 접근하면 그 진면목을 파악할 수 없다. 악무는 중세의 이데올로기였던 ‘禮樂論’과 연계해야만 그 실상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악무로서 민인을 교화한다는 ‘用樂化民’ 정책을 국가의 우선 과업으로 삼았다.

악무의 중요성 인식했던 중원정권

역대 중원정권은 그 중요성을 인식해 악무를 제국주의 실현 도구로 활용해 이른바 四夷諸國을 복속시키려 했다. 중세에는 한 나라를 정복하면 우선적으로 해당 국가의 악무를 수거해갔다. 당나라와 요나라가 ‘고구려‧백제‧발해’의 악무들을 전부 가져간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신라와 伽倻諸國은 이민족 국가에게 병탄되지 않았기 때문에 민족악무로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 백제의 악무는 중원의 사서를 검토하지 않으면 그 실체를 알 수가 없다. 『삼국사기』 「악」 조의 ‘고구려‧백제악’이 중원 사서에 의존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중원의 이 같은 樂舞帝國主義는 당이 백제를 침탈한 뒤 그들의 樂舞人을 데려와 府城이었던 공주에 주재시켜 唐樂(중국악무)을 전파코자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라 문무왕이 악인들을 공주에 보내 당악을 배우게 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한국 역대 민족악무가 살아남은 이유는, 중원 악무제국주의에 대항해 민족주의적 악무인식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악랄하게 우리의 민족악무를 억압하고, 일본풍의 「유행가」를 보급시켜 민족의 영혼을 파괴하려는 시도도 ‘용악화민’의 한 실례이다. 일제는 민족악무의 소멸은 민족국가의 소멸과 통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가야 제국이 신라에 통합된 뒤 ‘국악’이었던 「12곡」이 신라 악인들에 의해 「5곡」으로 산정돼 ‘大樂’으로 격하된 것 역시 악무가 국운과 무관치 않음을 말한다. 于勒은 가야 「12곡」이 「5곡」으로 축소되자, 망국의 비통함을 달래며 「5곡」이라도 보존된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민족 악무사의 전개에 다행인 점은, 신라가 고려조에, 고려조가 조선조에 통합됐기 때문에 ‘신라악무’와 ‘고려악무’가 약간의 가감을 거쳐 전승된 사실이다. 만약 이들 우리 왕조가 외국에 침탈됐다면 고구려‧백제처럼 신라‧고려조의 악무는 악무사에서 사라졌을 것이고, 일제 강점기가 오래 지속됐다면 우리의 민족악무는 치명적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신라악무와 고려악무가 살아남은 이유

『한국민족악무사』는 선인과 선학들의 國統意識에 근거해, ‘단군‧기자‧위만’의 三朝鮮과 부여‧예‧맥‧옥저 제국들과 삼한시대, 가야연맹과 삼국시대, 통일신라와 발해조의 남북국시대, 고려조와 조선조 및 대한제국시대, 일제강점기와 미 군정시기 등의 역대정권과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의 악무를 망라해 검토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사서와 각종 악무 관련 논저와 중원 『25사』의 「예악지」와 「동이전」과 다수의 『樂書』들을 두루 섭렵해 악무사를 서술했다. 아울러 중원악무와 소위 사이제국의 百戱歌舞와 기타 다기 다양한 악무들과의 소통과 융합에도 유의해, 민족악무를 광각으로 포착해 통시적으로 서술했다.

우리민족은 노래와 춤, 즉 악무를 유난히 즐겼다. 서력기원 전후에 채록된 『위서』 「동이전」과 기타 중국 사서들에 이구동성으로 우리 겨레를 두고, 밤새워 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는 민족이라 평했다. 철야로 가무 음주하는 습성은 수 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변함이 없고, 자정이 지나 새벽까지 불야성을 이루는 도시는 한국밖에 없고, 골목마다 즐비한 노래방 역시 타국에서는 찾기가 어렵다. 아마도 이 같은 습성은 우리민족의 유전인자에 깊숙이 각인되어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삼국사기』 보다 21년 전에 출간된 徐兢 『高麗圖經』(1124)에 중원제국주의 핵심 절목인 ‘儒學‧正朔‧樂律‧度量權衡’ 중 ‘악률’로서 천하를 중원중심으로 통합케 한다는 주장이 바로 악무제국주의 실상을 지적한 것이다. 여기서 언급한 天下는 중원과 소위 제후국인 사이 제국의 강역을 통틀어 지칭했다.

민족통합의 수단으로 활용된 악무

우리 역대왕조들도 악무를 민족통합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동동가무」‧「처용가무」‧「정읍사」를 정통 3대가무로 지정해 ‘고구려‧신라‧백제’ 고지의 민인들을 화합시켜 통합코자 했다. 그동안 학계에 다소 등한시됐던 ‘가야악무’와 ‘발해악무’에 대한 고찰은 의미가 있다. 夫餘系의 고구려 민인을 의식한 동동가무와, 백제 유민을 의식한 정읍사와, 三韓系의 신라 민인을 고려한 「처용가무」를, 조선조가 부각시킨 이유도 민족통합을 의식한 처사로 생각된다. 고려조는 고구려 재건을 표방하여 개국한 궁왕의 「팔관회」를 국가축전으로 승격시켜, 왕조 말까지 개최한 것 역시 부여계 민인의 통합을 위한 전략이었다.

중원 역대정권 또한 그들 역대왕조의 악무인 「六代舞」(황제의 雲門大卷‧요의 大咸‧순의 大韶‧우의 大夏‧탕의 大護‧무왕의 大武)를 기반으로 하고, 사이 제국을 정복해 얻은 악무를 「十部樂」으로 설정해 이를 천하통일의 상징으로 廟庭에서 연희했다. 아울러 그들의 악무인 「아악」을 주변국에 전수한 것 역시 악무제국주의와 同文主義(중원의 文化帝國主義)의 일환이다.

중원 정사 『25사』의 사이의 풍속과 악무와  문물제도 등을 기록한 「사이전」은 일종의 정보문서로서, 이를 참작하여 사이를 복속시키려는 전술의 하나였다. 중원이 사이 제국에게 「아악」 등을 줄 때도 편차가 있었다. 「佾舞」의 경우도 「8일무」가 아닌 「6일무」를 추게 했으며, 「아악」의 악기도 4면에 악기를 거는 ‘宮懸’이 아닌 3면에 다는 ‘軒懸’을 사용토록 했다. 이른바 황제예악과 제후예악의 변별이다.

우리민족은 외래문물을 개방적으로 수용했다. 일찍이 불교와 유학을 수용해 방방곡곡에 사찰과 향교와 서원이 편만했고, 지금은 성당과 교회가 도처에 즐비하다. 악무 역시 중원을 비롯해 서역과 동북아시아의 악무를 수용해 민족악무의 품격을 향상시켰다. 그리하여 전수한 국가에서는 소멸한 「아악」과 「8일무」 등을 민족악무로 변용해 지금도 종묘와 문묘에서 연희하고 있다. 외래악무의 수용은 민족악무를 단세포가 아닌 복합세포화 했기 때문에 미학적으로 완성된 악무로 거듭나게 했다. 19세기 전후부터 대륙문화권의 악무만 접하다가, 해양문화권의 악무가 홍수처럼 밀려왔지만, 민족악무는 이를 자양분으로 하여 글로벌 악무로 격상됨과 동시에, 「韓流樂舞」로 발돋음 해 전 세계 악무계를 석권하고 있다.

『한국민족악무사』는 일제강점기와 해방전후 무렵 민인들에게 널리 회자된 「유행가」를 통해,  망국의 아픔과 애절한 망향의 회한을 형상한 노랫말도 고찰했으며, 해방이후 서양악무의 유입과 연계된 소위 「우리가곡」의 허실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해방이후 초중고의 「서양가곡」 위주로 편성된 음악교과서 문제도 언급했고, 남북 분단의 처절한 심경을 노래한 「가요」에도 관심을 가졌다.

제천의례와 접맥되는 민족악무

민족악무는 본래 祭天儀禮와 접맥됐다. 제천의례의 악무는 주로 「일무」가 중심이 됐으며 의식이 끝난 후 여흥으로 백희가무와 「隊舞」 등이 연희됐다. 일무는 신에게 바치는 娛神舞이고, 대무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娛人舞이다. 시대의 진행에 따라 악무는 오신에서 오인 쪽으로 변모해갔다. 중세 국가신앙을 망라한 ‘祀典體系’와 악무도 연계가 견고하다. ‘大祀‧中祀‧小祀‧雜祀’ 등의 ‘三祀’로 분류된 국가신앙들과 그 제의에도 악무가 베풀어졌다. 제천과 용신 및 산천숭배의 의식에 본래 정통 민족악무가 중심이 됐으나, 나중에는 중원식 한문악장으로 대체됐다. 전래 민족악무가 퇴장하고 한문악장이 등장하자 민인들과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조선조는 악무와 더불어 국가신앙의 층위에도 관심을 가져 민족통합에 원용했는데, 이는 남북한을 비롯해 지역에 기반한 민족분열이 가일층 심화되고 있는 현재에도 필요하다. 역대 왕조의 개국시조에 대한 조선조의 숭앙도 주목된다. ‘환인‧환웅‧단군’을 모신 三聖祠, 단군을 모신 崇靈殿, 기자의 崇仁殿, 박혁거세의 崇德殿, 동명성왕의 朱蒙祠, 온조왕의 崇烈殿, 수로왕의 崇善殿, 왕태조의 崇義殿 등의 祠廟를 해당 지역에 조성해, 국가가 역대 정권을 단절이 아닌 계승적 차원으로 인식하여 제사를 올린 것도 민족통합의 수순이었는데, 조선조의 이 같은 시책은 민족이 사분오열된 오늘에 더욱 절실하다.

 

이민홍 성균관대 명예교수
대표 저서로 『사림파문학의 연구』, 『맹자 정치를 말하다』, 역서로 『通典-樂典』이 있으며, 대표 논문으로 「禮樂論과 한국역대왕조의 年號‧諡號‧廟號」가 있다. 한국시가학회장, 한국고전번역원 이사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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