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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냄새 물씬 풍기는 書簡의 매혹
삶의 냄새 물씬 풍기는 書簡의 매혹
  • 이은정 기자
  • 승인 2003.05.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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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계 풍경 : ‘옛 글에 밴 선현들의 情’ 展

“오라버님젼 샹서
야간
긔후 안녕 ㅎ·오시고
아바님 테후 강슈ㄴ ㅎ·오신 문안 아ㅇ·ㅂ고져 ㅂ·라오며
예셔ㄴ·ㄴ 대뎐 침슈 태평이ㅎ·와ㅅ·오며
ㅇ·환 밤은 엇디디내옵고
오ㄴ·ㄹ은 엇더 ㅎ·오니잇가”

명성황후의 시어머니격인 신정왕후 조씨는 자신의 오라버니에게 보내는 서간문에서 “오라버니께 올립니다/그간 기체 안녕하시고/아버님의 기체 강순하신지 문안 여쭈옵니다/요새는 大殿의 침수가 평안합니다/지난 밤은 어떻게 지냈으며/오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며 차분하게 친정의 안부를 묻는다. 미사여구 하나 없는 짧은 글이지만 달 밝은 밤 홀로 앉아 친정을 향한 그리움을 붓으로 달래고 있는 여식의 애잔한 마음이 절로 묻어 나온다.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인물들의 서간문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오는 6월 30일까지 성균관대 박물관에서 ‘옛 글에 밴 선현들의 情’ 展이 열리고 있는 것. 자연, 가족, 친구, 사제, 군신 등 5가지 작은 주제들로 구성된 이번 전시회에서는 정몽주, 성삼문, 이황, 송시열, 김정희, 민영환 등의 서간을 비롯한 47점의 서간문과 옛그림, 일기 등이 선을 보이고 있다. 아직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조선시대 국왕의 편지도 2점이나 전시돼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서법과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라는 점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서간이 생명력을 갖는 이유는 한 줄 한 줄 마다 배어있는 ‘情’에 있다. 정조시대 영의정 채제공은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위 샘물로 끓인 아침 죽 맛도 좋더니/꽃향기에 낮잠 들어 깨어보니 산오얏 피었구나/부끄럽다, 가난한 집안 무에 그리 바쁘다고/삼일이나 그대 잡아두고 술 한 잔 전하지 못했네”라며 바쁜 일상에서의 우정을 보듬기도 한다. 추사 김정희는 선배인 신위에게 보냈던 편지에 첨삭과 교정을 보며 고심한 흔적을 담아, 한 장의 작은 편지에도 애정을 쏟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지냈던 박세당이 자식의 혼인에 사용할 예복이 없어 친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에서는 당시 관리들의 청렴함도 살펴볼 수 있다. 

  이은정 기자 iris79@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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