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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사냥과 현대
머리사냥과 현대
  • 윤형숙 목포대
  • 승인 2003.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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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윤형숙 목포대·문화인류학

‘21세기는 문화의 세기’, ‘문화경쟁력이 국가경쟁력’이라는 말을 요즘 흔히 듣는다.  이런 시류를 타고 문화를 연구하는 인류학이라는 내 전공분야도 드디어 빛을 보게 되지 않을까 은근한 기대를 가져 본다. 다른 한편 문화산업의 원료로서의 문화가 지나치게 강조되고 문화연구의 본질적인 목적과 의미가 실종돼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하게 된다.  

문화를 인간의 총체적 삶의 양식으로 정의하는 문화인류학은 초창기에 ‘미개사회’, ‘원시사회’, ‘부족사회’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 소규모 사회 연구에 집중했다. 서구자본주의의 세계적 확산과정에서 ‘전통적인’ 연구대상인 미개사회와 미개인이 사라지자 인류학자들은 학문적 정체성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미개인을 단념할 수 없었던 일부 학자들은 도시로 간 미개인을 찾아서 도시를 헤맸다. 도시의 문화연구가가 된 것이다. 미개인의 실종으로 인류학자들이 학문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을 때 원시의 옷을 입은 미개인들이 영화, TV, 잡지 등 여러 대중매체에 홀연히 출현해 대중적인 흥미의 대상이 됐다. 미개인들에게 드리워지는 문명의 그늘을 가미한 세련된 상업영화도 나왔다. 1981년에 나와 흥행한 영화 ‘부쉬맨 I’이 좋은 예이다. ‘부쉬맨 I’은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부쉬맨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코카콜라 병을 보고 소동을 벌이는 모습을 통해 자본주의문명을 거부하면서도 그에 매혹당하는 모습을 그렸다.

끊임없이 색다르고 자극적인 흥밋거리를 요구하는 현대 대중사회에서 소재의 빈곤에 허덕이는 대중문화 전문가들에게 미개인은 좋은 소재다. 1990년대부터 진행돼 온 세계화와 문화 체험에 대한 대중의 요구 또한 미개인이 새로운 소재거리로 등장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됐다. TV 프로그램 담당자들은 인기연예인을 투입해 교양과 오락성을 적당히 버무린 상업적 오지(문화)탐험 프로그램을 만들어 방영하고 있다. 미개가 사라진 후 미개는 탐험과 ‘문화체험’ 프로그램의 ‘소재’로 부활해 우리의 일상에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상업성과 오락성을 가미해 대중들을 다른 문화에 관심을 갖게 하는 영화나 TV 프로그램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인기연예인이 출연해 더 많은 시청자들이 타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전략이다. 문화의 콘텐츠화와 대중화에 관심이 있는 문화연구관련자들이 눈길을 돌리는 부분이기도 하다. 문제는 ‘미개인’의 총체적인 삶의 양식이 상품적 요소와 가치로 전락하고 그들의 삶이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간과된다는 데 있다.  

인류학자 다이아몬드는 ‘고립된 진정한’ 미개사회가 지구상에서 모두 다 사라진다 해도 미개사회는 여전히 유효한 개념이라고 말한다. 미개인의 삶은 현대인의 모습을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이며 현대사회의 모순에 대한 비판적 코멘트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개는 현대인에게 흥미의 대상이 아니라 ‘생각하게 해 주는 자료’가 돼야 한다.

이라크 전쟁은 미개사회가 현대사회에 비판적 기능을 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는 좋은 사례다. 미개인들은 친척의 죽음에 대한 보복과 같은 매우 구체적이고 ‘인간적인’ 이유로 제한적인 전쟁을 한다. 그러나 작전명령에 따라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투하해 ‘깔끔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현대전쟁은 미개전쟁보다 훨씬 더 냉혹하고 비인간적이다.    

  
과거 동남아의 오지에 있었던 머리사냥을 위한 부족간의 전쟁도 이라크전의 석유사냥보다 더 인간적 동기에서 수행됐다고 볼 수 있다. 이 사냥의 목적은 적 전사의 머리 속에 들어 있을 것으로 여겨진 에너지와 생명력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있다는 것이 유력한 설명의 하나다. 이들은 때로 자기 집 처마에 사냥해 온 적 전사의 머리를 걸어 놓는다. 이라크 전후 복구작업에서 갖게 될 석유독점권을 놓고 다투는 석유사냥꾼들에게 인간은 더 이상 에너지와 생명력의 원천이 아니다. 에너지와 생명력은 석유와 돈에서 나오며 이라크 전사자의 머리는 석유와 돈을 위해 사라진 통계숫자에 지나지 않는다.

미개사회는 이라크전과 같은 현대사회의 전도된 가치와 야만성에 강력한 비판적 메시지를 보낸다. 미개사회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의 생활양식에 관한 연구는 전쟁뿐만 아니라 가족, 친족, 사회관계, 환경 등 현대사회가 가진 문제들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미개가 현대에 던지는 이런 시사점을 살리는 노력이 아쉽다. 문화산업과 경쟁력이라는 시대적 구호에 묻혀 실종되기 쉬운 문화연구의 궁극적 목적과 좌표를 새롭게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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