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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에 대한 세 가지 관점
연구자에 대한 세 가지 관점
  • 유선규 서울대 박사후연구원
  • 승인 2018.02.05 1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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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유선규 서울대 박사후연구원·전기정보공학부

어릴 적 ‘연구자’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협지에 나오는 正派 무공 수련자였다. 자신을 하루하루 갈고 닦아 능력치를 키우고, 선배 연구자에게서 비기를 전수받고, 여러 고난을 뚫고 밤낮으로 수련한 끝에 누구도 가보지 못한 영역에 도달하는 모습이 떠오를 때면 왠지 모를 엄숙함과 경건함이 느껴지곤 했었다. 아마도 주변에 연구자가 없고 위인 전기로만 접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대학원에 들어와 연구를 내 인생의 업으로 삼자고 결심했을 때는 연구자에 대한 이미지가 약간 바뀌어 있었다. 공부의 연장선상인 줄 알았던 ‘연구’라는 행위가 비록 작더라도 나만의 것을 창조해가는 작업이라는 점을 알고 나서야, 왜 이리도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이 작은 분야 하나하나에 몰려서 박 터지게 경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해내는 즐거움을 알고 나면 다른 일들은 영 재미없어지는 게, 다른 중독 증상들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박사 기간 동안 옆에서 보고 느꼈던 열정적인 연구자들은 그들 중 다수가 고상한 학문 도야 및 자기 수련보다는 오히려 각자 자신의 지적 욕구에 너무나도 충실한 邪派 무림인에 가까웠다. 필자 역시 논문을 쓰고 리뷰를 받아 한 문장 한 문장 수정을 할 때의 괴로움은 클지라도, 연구 주제를 찾아낼 때의 즐거움, 결과가 원하는 대로 나오기까지의 긴장감과 성취감, 내 이름을 단 논문이 세상에 나올 때의 희열을 이미 느껴본 이상은 다른 진로로 가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사후과정을 시작한지 2년이 된 지금은 다른 관점이 추가됐다.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아내는 어차피 인생은 한 번, 맘 편히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라고 하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런가. 결혼 전이야 원룸에서 평생 살아도 연구자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내 가족이 그러는 것은 원치 않았다. 어떤 연구 주제가 구직 시장에서 유리할까, 좋은 저널에는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곤 한다. 여러 박사후연구원들이 모이면 어느 대학 채용은 어떻다더라, 누구는 좋은 논문이 나갔다 던데 하는 걱정 섞인 대화가 오가곤 한다. 내게 연구자의 이미지는 생활인에 좀 더 가까워졌다.

세 가지 이미지 중 어떤 이미지가 정답이고 더 옳은 연구자의 모습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실제는 중첩된 모습이 아닐까 싶다. 한국연구재단의 학문후속세대 과제를 통한 지원은 내게 발견의 욕구에 솔직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벌어주었다. 이런 기회가 얼마나 큰 행운인지를 감사하면서도, 불투명한 미래의 압박에 얼마나 많은 邪派 동지들이 자의 반 타의 반 학계를 떠났을 지 생각해보면 복잡한 심경이 된다.

한편으로는 기초 연구비 삭감에 항의하는 연구자들의 ‘행태’에 개탄을 금치 못하고 연구자의 알뜰살뜰함 만을 강조하는 현 세태를 볼 때, 놀랍게도 사회적 인식은 첫 번째 관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과학 혁명을 통해 물질 문명과 자본주의의 기반을 닦아온 연구자라는 직업의 덕목으로 딸깍발이 정신만이 강조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우수 연구인력 확보를 통한 연구 저변 확대를 위해서는 연구도 결국은 현실 생활에 치이는 직업 활동이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인식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한 연구자가 얼마나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우수 성과를 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를 즐기지만, 우수 성과를 낸 사람조차 얼마나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애써 이야기하기를 피한다.

 

유선규 서울대 박사후연구원·전기정보공학부

서울대에서 이론 광학으로 박사를 했다. 광학 분야에서 연구를 수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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