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12:45 (토)
잘 익은 김치맛
잘 익은 김치맛
  • 정동준 대진대
  • 승인 2003.05.2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의 강의시간

정동준
대진대·사학
오늘날 기계에 대한 인간의 의존도는 가히 절대적이다. 이 현상은 교육현장이라 해서 예외가 아니다. 첨단기계를 많이 동원하는 교수에 비해 분필 하나 달랑 들고 90분 동안 맨손체조(?)를 하는 교수는 고리타분해 보인다. 그렇다면 강의를 위해 고안된 첨단기계들은 과연 최고의 강의를 약속할 수 있을까. 강의내용을 전달하는 데에 있어서 기계는 분명 편리하고 효과적이다. 내가 근무하는 대학도 강의를 위한 지원이 남다르다. 12평이 넘는 광활한(?) 연구실에는 비디오 강의를 준비할 수 있도록 텔레비전 및 DVD-VCR 겸용 플레이어가, 학과 사무실에는 실물환등기, 휴대용 컴퓨터, 복사기 등이 마련돼있다. 그러나 내가 담당하는 역사 교과목 강의에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10%에도 못 미친다.
강의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부분 즉, 자료의 분석-정리, 강의내용의 작성-수정, 예증이나 유머의 적절한 배치, 강의 전의 예습과 강의 후의 개선사항 점검 등은 기계가 아닌 교수 개인이 해야 할 몫이자 책임이다. 그러므로 강의에 있어서 첨단기계가 할 수 없는 부분은 너무나 많다. 기계가 정보의 수집이나 전달에 효과적일 수는 있지만, 수집한 정보를 묶거나 해석해 재구성하는 궁극적인 능력은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이 듣고 보는 강의는 인간의 열정-창조적 아이디어-학생의 입장에서 강의 분위기를 조정하는 능력-인간에 대한 사랑이 융합돼 만들어져야 한다. 조잡한 도구지만 이것을 가지고 내가 학생들과 함께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일부 사례를 보자. 
여름으로 접어들던 수년 전 6월의 어느 날 오후. 이날은 길이 1.5미터의 큼직한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유럽인들이 황금과 후추를 구하기 위해 개척한 동-서인도항로에 대해 설명하기로 돼있었다. 강의할 내용을 예습했건만, 내게는 고민거리가 남아있었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의 식곤증과 졸음을 쫓아낼 수 있을까. 생각 끝에 나는 커다랗고 파란 원통형 쓰레기통을 들고 강의실에 들어섰다. 놀라움, 기대, 호기심이 역력한 학생들의 표정. 그것만으로 강의는 절반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키가 크고 명랑한 한 학생에게 세계지도를 둘러 붙인 쓰레기통을 머리 위로 올려 천천히 돌도록 했다. 빈 쓰레기통을 가지고 지구의 자전을 우스꽝스럽게 연출한 덕분에 나의 고민은 깨끗이 해결됐고, 학생들은 이날의 강의를 화제 삼아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이날 강의할 핵심 중의 하나는 동-서인도항로의 개척을 가능하도록 한 위도항해의 개념이었다.
그리스인들이 겪은 전쟁에 대해 설명하면서, 다시 한 번 나는 장난기 섞인 아이디어를 활용해 학생들을 그리스의 한 전쟁터로 끌어들였다. 학생들은 방패를 대신해 왼손에는 책-노트-가방 등을 들었고, 오른손에는 창을 대신해 필기구를 들었다. 이들은 어깨를 맞닿도록 줄지어 대오를 형성했다. 그리고 나의 지시에 따라 대오를 유지한 채, 같은 대형을 갖춘 적을 향해 방패로 막고 창으로 찌르는 행위를 반복했다. 웃음 속에서 장난처럼 전개된 조직적인 육박전이 3분 정도 계속됐다. 그리고 이어지는 간단한 설명을 통해 학생들은, 밀집보병대형(Phalanx)들 사이의 전투에서 어째서 적의 대열 좌측면을 돌아 포위하는 것이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프랑스 유학 시절에 경험한 시행착오들도 학생들의 배꼽을 빼놓을 수도, 학문적 의욕을 자극할 수도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때문에 나의 강의는 ‘가벼운 분위기’와 ‘진지한 분위기’가 교차-점증되곤 한다. 그리고 ‘가벼운 분위기’를 ‘진지한’ 강의목표나 주제에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치밀한 시나리오와 예습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나는 자주 교내의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다. 숙성된 김치가 맛을 더하듯이, 강의의 내용과 질을 숙성시키기 위해. 때문에 도서관은 학생보다는 교수에게 더욱 필요한 공간이며, 강의를 위해 고안된 첨단기계를 압도하는 기관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