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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인문학자로 살아가기
21세기에 인문학자로 살아가기
  • 하유진 서강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8.01.29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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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하유진 서강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필자는 주요 관심분야인 중국 고대의 철학사상을 연구하면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으로 고전에 대한 역주 성과물을 간행한 바 있다.(『대반열반경집해 역주』(2013)) 『대반열반경집해』(509년 간행)에 대한 역주 작업은 천 오백년 전에 살았던 고대인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동시대인들과의 의사소통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고대인들의 생각을 뒤따라가 보는 일이 과연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이것은 스스로에게 역주 행위의 당위성을 부여하는 일이기도 하기에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의식이기도 했다. 『대반열반경집해』가 편찬돼 세상으로 나오게 된 과정은 어찌 보면 정부의 연구지원비를 받아 역주서를 세상에 내놓는 행위와도 닮아 있다.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 학자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그 사회적 신분을 보장해 주는 것은 세상의 여러 가지 크고 작은 걱정거리로부터 벗어나 학문에 몰두할 수 있는 연구 환경을 조성해 주는 일로서 학자에게 매우 커다란 도움이 된다. 당시 남조 양나라의 무제 역시 국가적 사업으로 불전의 편찬 및 그 주석집의 간행을 독려했고, 그러한 지원을 바탕으로 진말~송초 무렵 활발하게 활동했던 불교학자들의 주석들이 오늘날까지 세상에 남아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불교학자들의 고민 역시 지금의 우리의, 필자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위진남북조 시기는 반복되는 전란과 그로 인한 잦은 왕조의 교체 등으로 중국역사상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 가운데 하나였다. 일반백성도 아니고 그렇다고 권력자도 아닌 신분으로서 불교에 투신한 승려들의 눈에 비친 당시 시대상황은 아비규환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일반 백성들을 향해서 그들이 해줄 수 있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하룻밤 새에 뒤집어지는 천하를 통해 재물과 권력의 무상함을 목도한 그들에게 더 이상 인생의 허무함에 빠지지 말고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나가야만 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도 그때로부터 확연히 나아졌다고 단언하기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권력과 부의 집중현상이 가속화되면서 그로부터 소외된 자들의 박탈감과 좌절감이 심화되고 있으며, 삶에 대한 무력감과 더 이상 노력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이 자꾸만 사람들을 극단적인 선택의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경쟁은 극으로 치닫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어버리는 냉혹한 사회현실 속에서 천 오백년 전의 고대인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오직 자신의 내면적 가치를 믿고 의지하며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무한한 힘이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음을 의심하지 말라는 강력한 메시지다. 그것을 통해 천 오백년 전의 고대인들은 어떠한 고통의 상황에서도 절대로 삶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것과, 그 희망은 다른 곳도 아니고 다른 사람도 아닌 오직 자기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강력한 메시지를 오늘날 다시 되살려 비록 작은 연구실 한 귀퉁이에서나마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러한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학문을 하는 이의 작은 소망이 될 수 있으리라.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고 평가되는 자본주의 시대에 돈이 안 되는 순수학문을 고집하는 일이야말로 어리석은 바보나 할 짓이라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하다. 이제는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나를 스쳐간 수천명의 학생들과, 3-5년마다 0으로 리셋되는 연구업적들과, 연구사업의 종료와 함께 또다시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서곤 하는 학자의 삶이 힘겨운 여정에 고단함을 더하지만 물 한모금 구하기 힘든 황량한 사막을 건너는 와중에도 한걸음 한걸음 힘겹게 내딛는 이 길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격려해주는 학문적 동반자가 함께 한다면, 비록 고된 여정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을지라도 결코 외롭지만은 않으리라. 동료학자에 대한 존중과 사랑의 마음으로 동료의 학문적 가치를 인정하고 격려함으로써 서로의 삶이 별처럼 아름답게 반짝이며 빛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이야말로 학자가 지녀야 할 진정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비로소 황량한 사막을 벗어나 진리의 낙원으로 인도해줄 바닷가의 크고 아름다운 범선이 거짓말처럼 우리 눈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하유진 서강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중국 베이징대에서 축도생의 불교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도생의 돈오설」,  「불교의 행복론」 등의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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