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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 제작시기를 상향조정해야 하는 이유
청화백자 제작시기를 상향조정해야 하는 이유
  • 교수신문
  • 승인 2018.01.22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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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68. 백자청화운용문화형잔(白磁靑畵雲龍文花形盞)
(좌측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❶전접시조각(도마리1호가마터) ❷천마무늬뚜껑조각(번천리9호가마터) ❸백자화형잔 ❹백자청화양이잔(국립중앙박물관) ❺백자청화운용문화형잔 ❻화형잔 안바닥의 용무늬 ❼백자청화용문발(서울역사문화박물관)
(좌측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❶전접시조각(도마리1호가마터) ❷천마무늬뚜껑조각(번천리9호가마터) ❸백자화형잔 ❹백자청화양이잔(국립중앙박물관) ❺백자청화운용문화형잔 ❻화형잔 안바닥의 용무늬 ❼백자청화용문발(서울역사문화박물관)

『효종실록』에는 “태종 이방원이 國子博士로 있을 때 靑花盞을 즐겨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靑花盞’은 백자에 코발트안료로 문양을 그린 靑畵白磁를 말한다.

조선초기의 청화백자는 대부분이 중국에서 들여온 코발트안료(回回靑)를 사용하여 제작했는데 당시 중국에서도 청화안료가 매우 귀해 외국사신에게 靑畵磁器 판매를 금지할 정도였고 이를 어길 시에는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이런 국제정세에 따라서 국내에서도 세종30년(1448년)에는 중국에 파견하는 使臣에게 도자기의 매매를 일절 금하라는 명령이 예조에 내려질 정도였다.

청화안료 수입이 중단되자 조선왕실에서는 청화안료의 국산화에 몰두해 국내산 청화안료인 土靑을 개발하게 된다. 『세조실록』에는 “세조9년~10년(1463년~1464년)에 전라도 강진, 순천과 경상도 밀양과 의성, 울산에서 청화안료인 회회정과 유사한 回回靑相似石을 바쳤거나 土靑으로 畵沙器를 번조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울러 『睿宗實錄』에는 토청개발과 청화백자의 시험 제조에 관한 내용이 기록돼있다. 그러나 청화안료의 국산화와 대중화에 성공한 중국과는 달리 국내에서는 지속적인 개발이 이뤄지지 않았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큰 전란을 겪으면서 17세기까지 청화백자의 생산은 소량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 따라서 조선 초기 王室이 필요로 하는 청화백자의 수요를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청화안료의 수급으로 청화백자의 생산은 극히 절제 될 수밖에 없게 됐으며 당연히 왕족이나 극소수의 귀족에 한해 제작됐다.

경기도 광주에 散在돼있는 왕실 가마터에서 조선 초기 청화백자파편이 발견되는 곳은 우산리, 번천리, 무갑리, 도마리 등에 한정되며 출토되는 청화백자파편(사진1),(사진2)의 수량도 매우 적다. 애당초 高價의 청화안료를 중국에서 밀무역으로 구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생산량 자체가 적었던 것이다.

成俔(1439년~1505년)의 『齋叢話』에는 “세종 때 御器는 백자를 사용하고 세조 때 이르러 彩磁를 섞어 사용하였는데 중국 회회청을 구해 樽, 罌 盃, 觴에 그리니 중국 것과 다르지 않았다”라는 내용이 있다. 世祖때 이르러 청화백자를 생산하게 됐다는 내용이지만 『효종실록』에는 태종이 이미 “靑花盞”을 즐겨 사용한 기록이 나온다. 용재총화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태종이 사용한 ‘靑花盞’은 중국에서 수입한 청화백자잔이 된다. 그러나 ‘靑花盞’이 청화안료로 그림을 그린 ‘꽃모양의 잔(花形盞)’을 의미한다면 해석이 달라진다. ‘꽃모양의 잔(花形盞)’은 고려시대부터 靑磁, 金, 銀, 靑銅으로  제작돼 조선 초기까지 유행했으며 중국보다는 우리나라에서 크게 유행한 器形이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의 특별한 盞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고려시대부터 전해오는 ‘꽃모양 잔(花形盞)’(사진3)과 몸통의 양쪽에 귀가 달린 ‘兩耳盞’(사진4)이다. 이 두 종류의 잔은 모두 경기도에 위치한 왕실관요 작품으로 순백의 태토에 맑은 담청색 유약을 입혀서 고운 모래받침으로 번조한 上品白磁이다. (사진4)의 ‘白磁靑畵兩耳盞’은 잔의 안쪽 면 바닥에는 청화로 ‘福’자를 쓰고 굽 부분과 입구부분에 청화 띠를 둘렀으며 그 안의 몸통에는 꽃 넝쿨무늬를 그렸다. 청화의 발색은 진한 코발트색으로 푸르기 보다는 진갈색에 가까우며 국내에서 개발한 土靑안료로 추정 할 수도 있다. 비록 작은 盞에 불과하지만 조선 초기 청화백자의 兩耳盞으로는 진귀한 유물이다.

그동안 조선 초기에 제작된 花形盞은 대부분이 純白磁로서 (사진4)의 兩耳盞처럼 청화안료를 사용해 제작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태종 이방원이 즐겨 사용한 ‘靑花盞’이 청화안료를 사용한 ‘꽃모양 잔’이라면 중국에서 수입한 잔이 아니고 국내에서 제작한 청화안료를 사용한 꽃모양의 잔(白磁靑畵花形盞)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이 사례에 해당하는 유물이 없어서 태종이 사용한 ‘청화잔’은 중국에서 수입한 白磁盞으로 생각돼왔다. 따라서 성현의 『용재총화』에 청화백자 생산에 대한 기록의 해석을 조선 세조(1455년~1468년)때 부터 청화백자를 생산한 것으로 단정 지어 온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조선왕조의 청화백자의 생산 가능성은 항상 열려있었다.

(사진5)은 필자가 근년에 조사한 조선 초기에 제작된 ‘꽃모양 잔(花形盞)’으로 청화안료를 사용하여 제작한 유일한 작품이다.

몸통은 S자로 휘어진 여섯 잎이 모여진 꽃송이 형태로 (사진3)과 같은 형식이지만 잎의 조각이 유려하고 더 세련됐다. 굽바닥의 중심부는 올라와 있고 낮은 굽에는 고운 모래알이 붙어있다. 잡물을 제거한 고운 백토에 맑고 투명한 유약을 두껍게 입혀 갑발에서 정성스럽게 번조했으나 잔 안쪽 한 부분에는 충분히 열이 전달되지 않아 유약이 완전히 정착되지 않은 듯 표면이 매끄럽지 않다. 일부 떨어져 없어진 부분은 복원했으나 그나마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바닥 굽의 지름은 3.2cm이고 높이는 3.5cm, 입지름은 6.5cm이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잔 안쪽 바닥에 그려진 雲龍文樣으로 구름사이를 비상하는 역동적인 龍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청화안료의 발색은 맑고 진한 푸른색으로 청화색과는 다르며 중국에서 수입한 回回靑안료로 생각된다(사진6).

왕실에 소속된 圖畵署의 畵家 솜씨로 작은 ‘꽃모양 잔(花形盞)’에 또 하나의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古墳에서 출토되는 대부분의 조선 초기 관요백자들이 未使用品인 것처럼 거의 사용한 흔적이 없다. 조선 초기에 제작된 청화백자 중에서 잔이나 사발의 안쪽 면에 용문양이 그려진 사례는 거의 처음이고 조선 후기의 分院에서 제작된 사발 중에도 희귀한데 한 점이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사진7).   

『효종실록』에서 태종 이방원(1367년~1422년)이 사용한 ‘靑花盞’이 이런 형태의 花形盞(사진10)을 의미한다면 『용재총화』의 내용에 따라 세조 때부터 제작한 것으로 믿어온 우리나라 청화백자 제작 시기는 약 50여년 더 이른 시기로 상향조정돼야 한다.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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