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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주의 사이에서 선생 하기
국수주의 사이에서 선생 하기
  • 조은영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18.01.22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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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조은영 편집기획위원/원광대·미술사

“학교를 여는 이유는 감옥 문을 닫기 위해서다.” 빅토르 위고의 말이던가. 그렇다면 하고 많은 직업 중에 왜 학교 선생을 하는가? 교육을 통해 수십 년 후에 혹여 일어날 전쟁과 재난과 범죄를 막고 보다 나은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先生--앞서 살기 위함이 아닌가. 시대착오적인 이상주의자의 헛소리이려나.

구미에서 내셔널리즘과 우경화 정책이 확산되고, 동북아에서 민족주의, 국수주의, 국가주의가 정치외교, 사회, 문화예술 뿐 아니라 교단에 정착하고 있다. ‘지성과 양심’으로 시대를 선도해야할 교육계에 갖가지 명목으로 국수주의가 스며들어온다. 19세기 이래 유행처럼 번진 보헤미안이나 코스모폴리탄 생활방식이 보편화 된지 오래다. 일일생활권 세계의 국경, 인종, 문화를 넘나드는 유목인(nomad)의 삶을 사는 초국가주의 시대에 접어들수록 역설적이게도 소위 글로벌리즘의 ‘부작용’에 대응하는 국가주의 정책들이 인기를 얻는다. 

역사상 학교라는 교육기관이 가장 많은 시대에, 예측불허의 재난들은 세상을 불확실성의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어 간다. 학교는 사람이 사회에서 가능한 최대치의 돈, 권력, 성공을 가장 빠르고 영리하게 성취하도록 돕는 자기 경력개발 학원으로 탈바꿈했다. 우리 선생들은 이 목적달성을 위한 지식전달자이자 매개자가 된 셈이다. 선생은 모름지기 학생을 ‘쓸모있는’ 국민으로 개발하는 정책에 충실해야 ‘성공적인’ 업무수행자로 인정받는다. 나-우리 중심적 사고가 기반인 국가주의 교육은 재앙을 막기 위해 부단한 협상, 화해, 우호가 필수적인 국제관계에서는 무용지물, 아니 화근이 된다. 덕분에 인종·종교·민족적 타자 상대의 테러, 정치·경제·문화적 식민주의, 반이민정책과 난민문제 등 국가 간의 불균형한 힘의 역학, 이익상충, 관점과 정책의 간극은 갈수록 극대화된다.     

교토의 국제대학원 객원강의교수 시절 일이다. 일본, 중국, 미국 학생들이 모인 강의실은 이따금 각국 국가주의 간의 전쟁터 같았다. 한 과목은 미국, 유럽, 일본 교수진과 함께 다국적 재학생들과 온갖 역사적 사안과 현실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수업이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민족주의 사관으로 무장한 학생들, 일본출신의 구미 유학파들, 미국중심주의와 정치적 공정성(political correctness) 교육 사이에서 양육된 미국 학생들의 논쟁은 종종 국수주의 교육의 한계와 폐해를 예증했다. 자신에게는 지당한 ‘진실’과 자국중심적 사고가 국외에서는 전혀 합리적 설득력이 없는 무용지물임을 체휼하는 현장이었다. 때로 이들의 격앙된 모습은 만일 힘이 주어지면 재난과 전쟁을 마다하지 않을 태세였다.

서로 상충되는 ‘진실들’을 주장하는 국제학생들 사이에서, 다양한 국가·인종·문화의 상생과 초국가적 교육관을 지향하는 다국적 교수들은 각자의 또 다른 ‘진실’을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학생들 스스로가 과거의 교육이 주입한 ‘진실들’의 파편을 냉철하게 검증하고 역사의 퍼즐을 함께 재조합하는 열린 눈과 사고를 제시했다. 장차 재앙과 전쟁을 야기할 수 있는 국수주의의 씨앗들에게 더불어 상생하는 사고, 중재와 소통의 물꼬를 경륜 있는 선생들이 트는 것이었다.

이전에 재직했던 워싱턴 DC의 국립 스미소니언박물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대양·육대주의 수많은 국가들을 포괄하는 문화예술 전시장과 교육현장에서 각기 자국의 이익을 면밀히 추구했지만, 국수주의적 사관과 태도는 첨예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타국 민족주의를 비난하면서, 용인되지 않을 자국 국가주의에 대한 정당화를 애국으로 착각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새도 한국 학생보다 외국 학생이 더 많은 대학원 강의실에서 자문하게 된다. 국가 간 분쟁과 재난을 촉발시키는 자국 우선주의 사관과 정책들 사이에서 선생은 무엇을 하는가. 세계를 감옥화 하는 국수주의와 맞장이라도 뜨면서, 학교의 존립이유를 재고해볼까. 아니면 학교업무도 과중한데, 지식팔이 선생으로 짧은 인생을 버텨볼거나.

 

조은영 편집기획위원/원광대·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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