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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벗어난 순간 찾아오는 희열... 食慾으로 확인하는 '살아있음'의 기쁨
죽음 벗어난 순간 찾아오는 희열... 食慾으로 확인하는 '살아있음'의 기쁨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
  • 승인 2018.01.15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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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음식-음식의 문화사_ 12. 충성과 복종의 음식

인간은 본디 쾌락을 추구하는 동물이다. 인간을 ‘Homo Ludens’ 즉 놀이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것도 인간의 모든 행위가 쾌락 지향적이라는 인식에 근거한다고 나는 믿는다. 식도락이라는 말이 있듯 인간에게 있어 음식 섭취는 이제 더 이상 단순히 살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맛이라는 즐거움에 빠진 이후 음식에 대한 욕구 또는 욕망은 갈수록 강화됐다.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거지처럼 자꾸만 음식에 손이 가고, 그러면서도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도 먹고 또 먹는다.

진지한 열정으로 음식을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 건 나폴리를 다시 찾았을 때였다. 2017년의 봄은 아름다웠다. 나폴리 민요는 경쾌했다. 세계 3대 미항의 하나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지닐 만큼 빼어난 외모를 자랑하던 나폴리! 가꾸지 않고 방치해두어 추레해진 사람 얼굴처럼 나폴리 또한 초라해져 있었다. 희랍인들이 반해서 새로운 식민도시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 기원전 2000년경이다. 그래서 이름이 ‘신도시’라는 뜻의 Nea Polis로 명명됐다가 오늘날의 Napoli가 됐다. 영어로는 Naples다. 넘치는 재화 덕분에 그 어느 도시 부럽지 않던 영광의 도시. 그 빛나는 과거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없는가보다. 무엇보다 유감스러웠던 것은 오래전부터 ‘쓰레기의 도시’라는 악명과 함께 도시 이미지가 실추됐는데도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나폴리항은 전연 아름답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쾌활하고 맛있는 음식에 정열적인 모습을 보였다. 사람 사는 세상에 무엇이 달라지고 무엇이 변함없는 것일까.

다채로운 식감을 즐기는 식도락가는 해산물 듬뿍 도우 두툼한 피자 나폴레타나가 입에 맞을 것이다. 나폴리 피자는 토마토와 모짜렐라 치즈로 만드는 건 다른 동네와 큰 차이가 없지만, 토마토는 반드시 산 마르자노 산이어야 하고, 모짜렐라는 깜빠냐 물소 젖으로 만든 것이어야 한다는 게 다르다. 그래서일까 나폴리 피자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목록에 올라가 있다. 나폴리 사람들은 예로부터 고집스레 전통을 고수하며 맛있게 먹는 법을 알았다. 남녀 구별 없이 비노 네로(Vino Nero)를 즐겨 마시는 게 그렇다. 레드 와인을 이탈리아 사람들은 검은 와인이라고 부른다. 남들은 고개 절레절레 저을 절인 멸치 앤초비(anchovies)도 각별히 좋아한다. 나폴리 남자라면 손바닥만 한 앤초비를 인상 찡그리지 않고 한 입에 먹을 수 있어야 한다.

누구라서 안 그럴까 만은 나폴리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노는 걸 좋아한다. 노래하고 춤추기를 즐긴다. 문화가 이탈리아 다른 지방과 다르다. 이를 테면 바다 건너 시칠리아와도 판이하다. 로마인들이 자랑스럽게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 ‘우리의 바다라는 뜻)’이라고 부르던 지중해를 사이에 둔 지리적으로 가까운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열정과 냉정만큼 이 두 지역은 다르다. 사람 속내야 비슷하겠지만 감정을 드러내고 사느냐 아니냐에 따라 사는 모습, 그게 모여 만들어진 문화가 지역 간 차이를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시칠리아는 외세의 침입이 잦은 곳이었다. 7세기부터 11세기 말까지는 사라센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그 이후 1194년까지는 노르만의 통치하에 이색적인 문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노르만계 오트빌 왕가의 뒤를 이어 독일계 호엔슈타우펜 왕가, 프랑스의 앙주 왕가, 스페인의 아라곤 왕가 등이 잇달아 시칠리아섬의 주인 노릇을 한 끝에 잠시이기는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직접 통치를 거쳐 18세기에 이르러 나폴리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된다. 그 사이(13~19세기) 나폴리는 프랑스 앙쥬 왕가, 스페인 아라곤 왕가, 프랑스 부르봉 왕가, 보나파르트 왕가 등의 지배를 받으며 시칠리아와는 다른 별도의 왕국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이런 역사의 과정이 두 지역의 문화 차이를 초래한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됐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결정지어진다. 황금 수저와 흙수저가 갈리는 것이다. 물론 살아가면서 운명이 바뀌어 부귀와 권세를 누리는 경우와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목동이던 안토니오 지슬리에가 14세에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해 미카엘이라는 수도자 이름을 받고 볼로냐 수도원을 거쳐 도덕적으로 해이해진 교회 개혁에 열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46세 되던 1550년에는 강제로 로마로 추방당하기도 했던 그가 선임 교황 비오 4세의 선종 이후 19일간 지속된 콘클라베에서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고 마침내 15661762번째 생일을 맞이해 비오 5세로 즉위한다.

교황이 되고 보니 전담 요리사가 생겼다. 비오 5세의 개인 요리사였던 바르톨미오 스카피가 1570오페라(Opera)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는 무려 천 가지 이상의 요리법이 들어있는데, 나폴리 스타일의 피자 요리법이 그 중 하나다. 스카피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이탈리아에는 토마토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피자가 지금과 같은 맛이 아니라 달거나 짭짜름한 맛이었다. 옥수수나 칠면조 역시 그 당시에는 없었으므로 과거 나폴리의 음식문화는 현재와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나폴리 피자도 시간과 환경의 변화에 순응하며 오늘의 맛으로 재탄생했다. 이렇듯 르네상스(再生)는 도처에 있다.

 

사진 1. 마이시아프 성채. 시리아 암살단의 본거지였던 곳이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Assassins)
사진 1. 마이시아프 성채. 시리아 암살단의 본거지였던 곳이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Assassins)

 

쾌락에 약한 존재, 남성

암살자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 ‘assassin’이 마약으로 분류되는 하시시(hashishi)’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아는가? 사람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하시시를 복용했다. 지금은 모로코가 하시시의 주요 공급지이지만, 북인도는 오래 전부터 하시시 생산지로 유명했다. 한편 이집트에서는 아씨스(assis)’라는 이름으로 대마 잎을 가루로 만들어 또는 진액으로 만들어 피우고 복용했다. 터키에서도, 페르시아에서도 그랬고, 중국에서는 양귀비 진액인 아편(opium) 때문에 나라가 망할 뻔했다.

하시시는 대마 또는 대마초라고 하는 식물의 영어 이름이다. 이 말의 뿌리는 ‘grass’라는 뜻의 아랍어다. 이 말이 영어 어휘목록에 들어있다는 건 사람이 가고 문화가 옮겨갔다는 의미다. 하나의 현상으로서 문화는 이렇듯 사방으로 전파된다. 원산지에만 붙박혀 있는 문화는 가치가 없다.

30년 전 여름 인도를 거쳐 히말라야 산중의 나라 네팔에 갔을 때다. 수도는 카트만두. 거기서 멀지 않은 곳인 파탄(Patan)의 노천시장을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는데, 새파란 젊은 친구들 몇 간이 말을 걸며 들러붙었다. “하시시?” 30대 초반의 비교적 순진한 대한 남아였던 나는 그 말뜻을 몰랐다. 단지 네팔리(Nepali, 네팔사람)의 말투에서 뭔가 은밀한 느낌을 감지했을 뿐이다. 그게 뭐냐고 묻지 않자 그네들은 톤을 더 낮춰 소곤대는 어조로 동일한 말을 반복했다. “~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장사꾼들은 집요한 면이 있으면서도 지갑 열 손님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금세 알아챈다. 몇 발짝 따라오던 이들이 이내 다른 외국인에게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시시 즉 대마초는 우리나라에서는 재배와 복용이 금지된 식물인데, ‘대마하면 연상되는 것이 대마초 연예인’, ‘대마사범’, ‘대마초 불법 재배와 같은 상서롭지 못한 표현들이다. 서양에서는 마리화나(marijuana)라고 부르며 비교적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분위기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이 젊은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몇 차례 마리화나를 피웠다는 고백을 치기 어린 젊은이의 용서받을 행동쯤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 아니겠는가? 문화가 다르면 사회적 인식이나 적용되는 법률이 다르다.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는 커피숍이 마리화나 피우는 곳이다. 우리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사진 2. 핫사신
사진 2. 핫사신

 

충성과 맞바꾼 쾌락 하시시

사람들은 왜 아편이나 하시시 같은 마약류에 끌릴까? 오늘날 아프리카에서는 독재 정부에 항거한다는 반군들이 어린아이들을 잡아다가 마약을 먹이고 두려움과 수치심을 잊고 그릇된 용기를 갖게 하며 잔인한 행동을 서슴없이 망설이지 않고 하게 만든다. 이렇듯 마약에 취하면 인간의 탈을 쓴 잔혹한 군인이나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이다. IS라는 이슬람 테러단체 또한 마약을 통한 환락과 방종을 모병과 성전의 미끼로 이용한다. 토마스 카알라일이 말한 소영웅주의에 사로잡힌 순진하지만 무모한 젊은이들이 마약의 늪에 빠지면 신의 이름으로 용병이 되고 사람을 죽이거나 잔혹 게임을 즐긴다.

과거에는 목숨 내놓고 싸우는 전쟁에 임할 때 마약으로 나약해지는 마음을 잊고 장수의 용맹함과 패기를 끌어올렸다. 오늘날에는 운동선수들이 마약의 힘을 빌려 기록을 갱신하고, 연예인들이 피로를 극복한다며 수치심을 잊는다. 중앙유라시아 초원의 스키타이 유목민 중에는 마약쟁이 스키타이라는 이름을 가진 부족도 있었다. 페르시아인들이 Hauma-drinking Saka라고 불렀던 이들은 늘 하우마(hauma) 혹은 소마(soma)라고 불리는 환각 음료를 마셨다. 그리고 스키타이 전사들은 전투나 약탈에 나서 겁 없이 싸웠다.

20년 전 쯤 상당히 흥미로운 영화를 보았다. 근육질 남자 배우 실베스터 스탤론과 끈적끈적한 라틴계 배우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주연한 암살자 영화 어쌔신(Assassins)이다. 지적인 분위기의 줄리안 무어도 출연해 멋진 주인공 스탤론을 사랑하는 일렉트라 역을 맡았는데 영화는 흥행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암살자’, ‘자객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assassin’은 역사적으로는 11~13세기 십자군 시대에 기독교도를 암살하고 폭행한 이스마일리파 이슬람교도 암살단의 아랍어 이름 알 하샤신 (al-Ḥashāshīn)에서 유래한다. ‘산중 노인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신비의 인물이 이끄는 비밀결사체 니자리 이스마일리는 시아파 이슬람의 한 갈래인 이스마일파의 한 분파로 엄격한 규율과 훈련을 통해 종교상의 적대자와 정적 등을 암살한 것으로 유명한 집단이다.

이란 북서부 카스피해 남쪽 알보로즈 산맥에 자리 잡은 알라무트(Alamut) 요새가 이들의 본거지였다. 이곳의 역사는 젊은이들을 미혹하는 하시시의 위력이 어떠한가를 보여준다. 알프스 고원에 에델바이스가 자생하듯 중앙유라시아 초원이나 산간에는 야생의 대마와 양귀비가 스스로 자라나 지천이다. 여기 알보로즈 산중의 대마가 수많은 젊은 영혼들을 미혹해 스스로를 망치고 세상을 어지럽혔다. 이곳에서 대마와 아리따운 여성과 맛있는 음식을 제공받은 젊은 무슬림들이 암살자가 되어 셀죽 튀르크의 재상 니잠 알 물크 등 수많은 인사들의 목숨을 끊었다. 이곳이 1256년 겨울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군에 의해 정복되지 않았다면 세상은 꽤 오랫동안 마약쟁이들의 광기어린 행동으로 어지러웠을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1273년 몽골군이 파괴한 알라무트 요새를 방문한 뒤 알라무트에서 하시시를 먹이면서 암살자를 키웠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종교지도자가 장차 용감한 남자가 될 것으로 보이는 12살 소년들에게 하시시를 먹인다. 소년들은 3일 동안 잠을 자는데, 깨어나 보면 황홀한 것들에 둘러싸여 마치 자신들이 천국에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아름다운 처녀들이 시중을 들고 원하는 것은 모두 얻을 수 있다. 그러니 결코 자의로 떠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이때 지도자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으면 가서 이렇게 하라. 이는 너를 천국에 들여보내기 위함이다라는 살인 명령을 내린다. 천국의 쾌락을 경험한 젊은 암살자는 기꺼이 암살자가 된다.

 

사진 3. 아사신파의 창시자 핫산 사바흐(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Assassins)
사진 3. 아사신파의 창시자 핫산 사바흐(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Assassins)

 

보상으로서의 폭식

영화 캐리비언의 해적에도 그려져 있듯이, 약탈이 끝나고 나면, 전쟁에서 승리를 자축하듯, 해적들은 먹을 것에 탐닉했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순간 찾아드는 희열이 해적들을 들뜨게 했다. 마약을 하지 않아도 야릇한 기쁨이 용솟음쳤고, 그래서 그들은 맛있는 음식을 닥치는 대로 먹는 데서, 게걸스럽게 마셔대는 데서 살아있음의 기쁨을 만끽했다. 부녀자 겁탈도 일종의 보상행위였다.

평소 신분과 명칭이 다르다는 점을 제외하곤 그들과 해적들은 똑 같았다. 주군을 위해 헌신하는 그들은 충성스런 개와 다름없었다. 주군의 명령에 따라,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친위대 혹은 호위무사는 주군을 보호하고 주군을 승자로 만든 덕분에 전리품을 분배받았다. 그들의 보상이란 그 정도로만 값진 것이었다. 전리품 중에는 금은보화 뿐 아니라 여자도 포함됐다.

영웅적 군주에게는 늘 충성스런 친위부대가 있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주군을 지키기로 맹세한 주군의 친구 혹은 동지들로 구성된 전투부대다. “우리는 생사고락을 함께 할 것이며 필요하다면 서로를 위해 목숨을 내놓겠노라는 이들의 맹세는 술잔이 아니라 피의 잔으로 이뤄진다. 각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 잔에 떨어뜨린 후 모아진 피에 술을 섞어 나눠 마시거나 칼끝에 피를 묻혀 입술을 적시는 순간 그들은 血盟(blood brothers)이 되고 그 무엇도 그들을 갈라놓을 수 없었다. 서로 간 신의를 잃는 그 어떤 행위도 용납되지 않았다. 피의 잔 이것은 주군의 호위무사에게는 그 어떤 것과도 맞바꿀 수 없는 신성한 음료였다. 이슬람 암살단을 기른 마약은 이들에게는 모욕이고 무가치한 것이었다. 오직 죽음만이 충성의 음료를 대신할 수 있었다.

연호택 교수는   충청도에서 났다. 한국외대에서 박사학위를 했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 준비 중에 있다. 가톨릭관동대에서 30년 가까이 영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30여 년 세상 곳곳을 여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등이 있다.

 

 

 

 

 

 

연호택 가톨릭관동대 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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