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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입에 물고
담배를 입에 물고
  • 김누리 /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03.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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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고등학교 시절 나는 시쳇말로 ‘범생’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별난 말썽꾸러기도 아니었지만, 학생주임의 눈엔 분명 ‘문제아’로 보였을 것이다. 보충수업 시간이면 우리 3인방은 일찌감치 가방을 챙겨 학교를 탈출하곤 했다. 몰려가는 곳은 늘상 집 뒷산의 ‘왕바위’였다. 소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우리는 이슬이 젖도록 밤을 지샜다. 캄캄한 밤 뿌연 별빛 속으로 김민기, 양희은, 송창식을 날려보냈고, 어설픈 입술에 릴케, 카프카, 니체를 실어 ‘인생이라는 괴물’과 씨름하곤 했다. 유신말기, 거대한 병영사회의 숨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저항이란 고작 이런 하릴없는 모습이었다.

사실 내가 ‘범생’이 되지 못한 것은 아버지의 탓도 크다. 아버지는 나의 행동에 대해 도대체 가타부타 말씀이 없으셨다. 나에게 무어라 간섭을 하거나 핀잔을 준 적이 없었을 뿐더러, 심지어 나의 ‘불량’한 행동까지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담배만 해도 그렇다. 나는 고등학교 때 이미 아버지 앞에서 담배를 피웠던 것이다. 당시 아버지는 무슨 이유에선지 외국사람을 만날 때면 나를 데리고 다니곤 했는데, 한번은 무슨 대사의 집에 초대를 받은 자리였다. 대사는 식사가 끝나자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서양식대로 돌아가며 담배를 권했다. 마침내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땡큐” 하며 담배를 뽑아 물었다. 꿀맛이었다. 며칠 후 아버지는 지나가는 말로 말씀하셨다. “세상은 네 뜻으로 네 방식대로 사는 거야.”

그건 1978년,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그 일은 내게는 일종의 ‘문화혁명’이었다. 그후 나는 기성의 관행에 무작정 순종하지는 않았을 뿐 아니라, 또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생각을 턱없이 강요한 적도 없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는 분명 한 시대를 앞서간 분이셨다. 어린 자식의 ‘파격’을 말없이 인정해줌으로써 인간에 대한 예의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셨던 거다. 

유시민 의원의 ‘복장불량 사건’을 보면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한다. 당신은 어린 자식의 철없는 선택도 존중해주셨다. 대한민국 국회는 ‘평상복’ 입은 국회의원의 선서를 거부했다. 심지어 정치적 사안에서는 자유주의적인 입장을 보이던 의원들마저도 복장에 관해서는 수구적 인물들과 한 목소리로 핏대를 올렸다. 유시민 사건을 보면서 한국사회에선 문화적 보수성이 정치적 보수성보다 훨씬 더 뿌리깊고 강고하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다. 4·19, 5·18, 6·10으로 이어지는 정치혁명의 전통은 찬란한 데 비해, 서구의 68혁명과 같은 문화혁명이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우리의 현대사 때문이리라. 졸부문화는 나날이 번성하는데 문화민주화는 여전히 요원하기만 한 현실 앞에 숨이 턱 막힌다. 

유시민을 생각하며 담배를 입에 문다. 맛이 쓰다.

김누리 / 편집기획위원·중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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