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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열정만으로 ‘인프라 격차’ 따라잡을 수 있나
학문적 열정만으로 ‘인프라 격차’ 따라잡을 수 있나
  • 설유정 기자
  • 승인 2003.05.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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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기업, 대학을 키워라 2. 국가의 교육 책무 강화

“서울대 박사와 스탠포드 박사 중 누구를 뽑겠습니까.”
한 서울대 교수가 털어놓는 이야기다. 국내 대학에 대한 ‘선호’가 낮아지다 못해 이제 국내 최고 대학이라는 서울대의 학위도 ‘매력’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학생수 증가와 함께 부실해진 대학 교육은 학생들을 해외유학, 고시, 취업 준비로 내몰고 있다. 특히 대학원은 최근 학령인구의 절대 감소와 함께 대학원 기피가 맞물려 미달이 속출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학기관이 우수 연구자들을 끌어당기고 학문적 결과물을 배출하는 곳이 아니라, 학문을 적당히 소비하거나, 제3세계 연구자를 수입하는 곳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무엇이 의욕 있는 학생, 연구자, 교수들로 하여금 ‘국내에서 학문한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하는가.

OECD 국가중 교육 공적재원비율 최저
그 해답은 IMF 직후 연구소 인력이 가장 먼저 구조조정의 대상이 됐다는 데 있다. 학문의 길을 포기하고 취업에 나서거나 안정적인 ‘미국 박사’의 길을 택하는 사람이 느는 것은 ‘학자’의 신분 안정성이 낮기 때문이다. GDP 대비 대학지원 비율은 어떤가. 핀란드 1.7%, 호주 1.2%, 미국 1.1% 등 OECD 평균이 1.0%에 이르지만 한국의 대학지원 비율은 0.43%로, 말레이시아 1.1%, 태국 0.7%에도 못 미친다. 고등교육기관에 대한 공적재원 수치는 더욱 낮다. 2001년 공공재원 비율은 오스트리아 98.9%, 프랑스 85.5%, 영국 62.7%, 미국 46.8%인데 반해 한국은 16.7%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낮다.
대학 관계자들은 학문적 열정만으로 인프라의 격차를 따라잡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강조한다. 학생과 교수들이 턱없이 부족한 기숙사 시설 탓에 하루 두 세시간을 출퇴근에 보내면서 경쟁력 있는 연구를 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대학 시설과 기자재의 부족은 말할 것도 없다. 부족한 간접비 제공, 매칭 펀드 요구 등은 연구의 수월성 제고와 동떨어져 있다는 비판을 받을 만 하다.
정부는 현재 GDP 6% 규모로 책정된 교육예산을 이행하고, 그 중 1%를 고등교육예산에 할당해야 한다. 그리고 ‘지속성’과 ‘무간섭’의 원칙만 보장하면 된다. 가계부 쓰듯 똑 떨어지는 연구 진행이 불가능한데도 불구하고 관료적인 집행을 요구한다면 창의성을 죽이고 천편일률을 강제하는 셈이다. 학부제와 같이 정부 지원금을 미끼로 한 조건부 지원은 학자들의 연구의욕과 대학의 사기를 저하시킨다. 기초학문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은 공적기관에 의해 제공되는 연구비인데, 선진국과 달리 연구비를 제공하며 마치 큰 은혜라도 베푸는 듯한 고압적인 자세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상의 ‘요구안’은 대학 스스로의 자구책과 함께 진행돼야 한다. 일본의 4년제대 ‘릿시칸’이 일본 사회에 대학 도산 시대의 서막을 열었듯이, 대학 생존 노력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의 혁신이 필요한가.
현재 대학 기능의 혼란은 상아탑도, 산업사회에 걸맞는 인력 양성소도 아닌 현 대학 시스템의 어정쩡한 체계에 있다. 전문대를 포함하면 고등학생의 95%가 대학에 진학하는 상황에서 대학이 많기도 하지만, 역할 분담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대학 교육의 질에 대한 불신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국립대의 기초학문 육성, 사립대의 응용학문 육성이란 대전제 하에, 4년제대와 전문대, 산업대, 교육대 등이 각각의 기능에 충실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구조조정의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무사안일에 빠진 국립대, 자자손손 ‘사유재산’으로 이어가는 사립대로는 예산을 요구할 당위성이 없다.
최근 한일장신대가 학내 합의를 얻어 입학정원 및 학과를 절반 가량으로 감축하는 구조조정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국민의 공평한 납세로 만들어진 재원을 독식해온 만큼 이런 개혁은 오히려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국립대가 주도할 책임이 있다. 지역 거점 대학을 연구 중심으로 육성해 기초 학문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하는 만큼 사립대에 넘길 필요가 있는 학과들은 폐과하거나 통폐합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옥석 가리는 작업, 대학이 나서야
또한 학문간, 대학간 교류가 활성화돼야 한다. 특히 지역 대학간에 중복되는 투자나 기자재 구입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은 대학간 학문간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것이다. 무조건 재정을 늘리라고 요구하기 전에 국가적 낭비를 줄이기 위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큰 규모는 줄이고, 작은 규모는 늘리면서 가장 효율적인 규모를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 대학은 여러 문제들을 끌어안고 있지만 그렇다고 총체적 부실도 아닌 상황이다. 서울대의 경우 지난해 세계 34위에 해당하는 SCI 논문 발표를 기록했다. 하버드대의 예산이 2조9천6백45억원, 도쿄대가 2조1천5백48억원인 반면 2천6백19억원에 불과한 예산을 가진 서울대의 쾌거다. 서울대는 연구비나 연구기자재에 있어서도 미국의 10%, 일본의 20%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효율화가 앞서지 않으면 이는 일시적인 성과에 그칠 것이다. 서울대가 ‘독점적 학문 권력’, ‘백화점식 학문 나열’이라는 구태의연의 상징으로 회자되는 한, 다른 대학들의 혁신도 百年河淸이다.
대학의 선도적 개혁과 학문 발전을 이끌 동력 수립, 재원 마련이 병행해야 한다.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은 재원을 늘리고 이를 지속적으로, 최대한 간섭 없이 집행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 대학간의 역할 분담을 명확히 제시하고, 자발적 구조조정을 독려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설유정 기자 syj@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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