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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포스트 모더니즘
인문학과 포스트 모더니즘
  • 이한구 경희대 석좌교수·철학
  • 승인 2018.01.02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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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이한구 경희대 석좌교수·철학

세계는 지금 3차 정보통신 혁명을 바탕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논의하고 있다. 발전의 속도가 너무 빨라 현기증이 날 정도다. AI 인공지능이 얼마만큼 우리의 생활 속에 침투해 들어올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많은 학자들이 인간과 기계가 상호 소통하는 포스트 휴먼 시대를 예언하고 있다.

세계화도 어떤 집단이나 국가가 막기에는 너무나도 도도한 우리 시대의 흐름이다. 아마도 이런 흐름을 외면하고 삶을 설계한다면 개인이든 국가든 조만간 역사의 낙오자가 되고 말 가능성이 높다. 세계화가 싫고 좋고의 문제를 넘어선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은 반세계화 운동도 세계적 연대를 통해서만 의미를 찾는 역설적 현실이 이를 방증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도 인문학을 위축시키는 사회적 조건이나 분위기만을 탓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냉철히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왜 우리가 대학에서 학문의 한 분과로서 인문학을 가르치는가? 상아탑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인문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인문학이 무엇이고 그 역할이 어떤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관점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날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인문학도라면 인류가 당면한 삶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직, 간접으로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인문학의 중요 역할이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인류는 지금 환경과 기후문제를 비롯해 문화적 정체성의 위기, 자민족 중심주의 역사관, 국경과 이주의 제한, 핵전쟁의 위험, 양극화의 심화, 성차별, 패권주의 정치 등의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인문학은 어떤 해법을 제시할 자세가 되어 있는가?

1960년대 말 이후 인문학을 지배하고 있는 사조가 포스트 모더니즘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대략 다음과 같은 논제들로 구성된다. 1) 현실은 언어에 의해 창조되며, 언어를 떠난 객관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2) 텍스트에 대한 모든 해석은 주관적이며 가치에 관한 보편적 기준은 없다. 3) 지식은 정치적 성격을 갖는다.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진리란 없으며, 각 사회는 고유한 진리체계와 진리의 일반정치학을 갖고 있다.
 이런 주장들이 절대적 진리나 보편적 이성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던 부당한 억압과 지배논리에 통열한 비판을 가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렇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이 주장하는 언어의 기능에 대한 과장된 왜곡과, 객관적 진리에 대한 외면, 이성적 존재로서의 자율적 주체성에 대한 부정 등은 새로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는 거리가 멀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비판적 논리는 문명과 야만, 정상과 광기 간의 이분법적 구분을 해체하면서 간수와 죄수, 의사와 환자 사이를 지식과 권력의 기제로 해석하는 미쉘 푸코나 해체와 차연을 주장하는 자크 데리다가 잘 대변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에 경도된 인문학자들은 대체로 인간을 언어의 감옥에 갇힌 죄수와 같은 존재로 본다. 이것은 인간은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는 언어 결정론이다.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결정짓고 현실을 규정한다는 언어결정론은 모든 사회적 현실은 경제가 결정한다는 칼 마르크스의 경제결정론이나 무의식이 인간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무의식 결정론과 같은 질곡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언어결정론에서 보면 현실은 언어의 창조물이므로 우리는 언어 없이 현실과 직접 대면할 수 없다. 현실은 언제나 언어로 감싸여 있고, 우리가 마주치는 현실이란 객관적인 실재가 아니다. 이때, 현실이 언어로 ‘가공된’ 현실이라는 것도 문제지만, 더욱 큰 문제는 현실을 가공하는 언어체계가 다수라는 점이다. 이런 주장은 불가피하게 상대주의나 회의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정치적 포퓰리즘과 결탁하면서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유행하면서, 권력자들은 자신의 의도대로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을 전문가로 둔갑시키거나, 아예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구별을 불필요한 것처럼 만들어버린다. 이런 일은 세계 도차에 만연한 현상이다. 어차피 객관적 현실이나 객관적 지식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아마추어와 전문가의 구별은 의미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포스트 모더니즘에 인문학이 매몰돼 있는 한, 인문학이 인류에게 닥친 문제해결에 어떤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할 것이다. 인문학이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넘어서서, 열린 자세로 다시 객관적 사실과 보편적 진리를 논의하는 일이다. 이런 주장이 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금년 여름 벨기에 리에주에서 열린 ‘세계 인문학 학술대회’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한구 경희대 석좌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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