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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 어둠을 몰아내고 참마음으로 다시 나는 해가 되길
마음 속 어둠을 몰아내고 참마음으로 다시 나는 해가 되길
  • 김교빈 호서대 철학
  • 승인 2018.01.0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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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시론_진실이 침몰하지 않는 무술년 새해를 꿈꾸며

정유년이 가고 무술년이 밝았다. 지나간 시간은 모두 ‘다사다난’했다지만 2017년은 정말 그러했다. 자국 이익을 앞세우는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오르면서 국제관계가 요동치기 시작했고, 핵보유국 반열에 가까워진 북한과 미국의 갈등이 커질 때마다 한반도 전쟁 위기설이 불거졌다. 이런 와중에 사드가 한반도에 배치됐고, 그 결과 중국의 경제보복이 뒤따르면서 관광객의 급격한 감소와 함께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2017년의 압권은 대통령 탄핵 결정과 그에 따른 국내 상황의 변화였다. 2016년 10월 29일 시작된 ‘박근혜 탄핵’ 촛불 집회는 작은 들불이 광야를 태우듯 전국을 넘어 해외까지 이어졌고, 마침내 3월 10일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을 이끌어 낸 것이다. 이명박 박근혜 두 정권 내내 코미디 프로를 볼지언정 뉴스를 보지 않던 필자가, 코미디보다 더 코미디 같은 국정농단 소식을 듣기 위해 다시 뉴스 보도에 빠진 것도 촛불 이후의 변화였다.

 

촛불이 밝힌 대한민국 민주주의

촛불집회는 이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도 실린 고유명사가 됐다. 이 책은 촛불집회를 ‘일몰 후 주로 옥외에서 촛불을 들고 진행하는 집회’로 정의하고 ‘항의나 추모를 목적으로 하는 비폭력 평화시위의 주요방식’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촛불집회가 1960년대 미국의 반전 시위에서 시작됐다지만 그 완성은 우리 국민의 성숙한 시민의식에 의해서였다. 마치 조선 말 평안도 농민항쟁과 임술농민항쟁의 연장선에서 갑오농민혁명의 불이 올랐던 것처럼,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숨진 두 여중생 추모집회부터 2004년 노무현 전대통령 탄핵반대 집회, 2008년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 집회를 거쳐 마침내 박근혜 탄핵집회에서 정점을 찍은 것이다.

1917년 2월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23차에 걸친 촛불집회에 국민 3명 가운데 한 명이 참석한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대부분 자발적 참여였으며 한 명의 사법처리 대상자도 없었던 점은 더욱 놀랍다. 그 결과 독일의 에버트 재단은 한국의 ‘촛불시민’을 ‘2017 에버트 인권상’ 수상자로 결정했다. 모 주간지가 한 ‘촛불시민’에게 수상 소감을 물었을 때 이민 가고 싶을 정도로 한국 사회에 대한 불신이 컸는데 집회를 통해 사람에 대한 믿음을 다시 발견했다고 했고, 또 다른 시민은 ‘모든 영광을 박근혜 씨에게 돌립니다.’라고 했다. 

 

파사가 현정이요 현정이 파사라

<교수신문>은 2001년부터 한 해를 정리하는 사자성어를 선정해 왔으며, 2017년 사자성어로는 최경봉 원광대 교수와 최재목 영남대 교수가 추천한 ‘破邪顯正’을 뽑았다. ‘이게 나라냐?’고 외치던 촛불의 분노가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박근혜 정권을 붕괴시키면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는 초석이 시작됐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자성어인 것이다.

사실 ‘파사현정’은 교수신문이 2011년을 결산하는 사자성어 ‘掩耳盜鐘’과 함께 2012년 새해의 희망을 담는 사자성어로 선정했던 문구이다. 하지만 나라를 자신의 기업처럼 경영하던 이명박정권을 나라를 제 살림처럼 꾸리는 박근혜정권이 이어 받음으로써 헛된 꿈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6년 만에 올 해를 결산하는 사자성어로 다시 자리매김한 것이다. 6년 전 ‘파사현정’을 추천했던 필자로서는 9년에 걸친 두 정권의 어둠이 마침내 끝났다는 기쁨과 함께 이명박 집권 5년으로 끝냈어야 할 어두운 시절에다 아까운 4년을 보탰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파사현정’은 2018년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파사현정’은 잘못된 것을 부수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불교 용어이다. 세상 논리에서는 ‘파사’ 뒤에 ‘현정’이 온다고 보겠지만, 불교 논리로는 ‘파사’ 밖에 ‘현정’이 있는 것이 아니니, ‘파사’가 곧 ‘현정’이요, ‘현정’이 곧 ‘파사’인 것이다. 일찍이 원효선사는 ‘한 마음에 두 개의 문(一心二門)’을 말했다. 깨달음을 얻는 것도 이 마음이고 깨닫지 못하는 것도 이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파사’와 ‘현정’ 모두 그 근본 대상은 이 마음인 셈이다.

‘촛불’의 힘은 각성된 마음에서 시작하여 共感을 통해 확장됐다. ‘공감하는 인간(Homo Empathicus)’으로 인류를 규정한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ikin)처럼 ‘세월호’ 유가족의 아픔에 공감하고, 최순실과 정유라를 향한 이대 학생들의 분노에 공감하고, 마침내는 박근혜의 국정농단에 대한 실망과 분노에 공감하면서 가족의 손을 잡고, 친구와 선후배와 어깨 걸고 함께하는 데에서 힘이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파사현정을 통해 무너진 시스템과 법 규정도 바로잡아야겠지만 궁극에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바로잡는 일로 나아가야 한다. 정치보복과 적폐청산의 피로감을 입에 올리면서 역사의 준엄한 흐름을 멈추게 하려는 청산대상자나 부역자들의 눙치는 소리에 현혹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天下興亡의 책임이 匹夫에게도 있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서자 중국 지식인들은 현실에 대한 반성과 함께 미래를 위한 대안을 내 놓았다. 황종희는 『명이대방록』에서 ‘천하가 주인이고 군주는 손님일 뿐’이라고 하면서 명나라가 망한 근본 원인이 군주가 천하를 위하지 않고 자신의 사익을 챙기려 한 데 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신하도 천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만일 군주를 위해 존재하는 신하가 있다면 이는 환관이나 궁녀일 뿐이라고 했다. 황종희의 관점에서 보면 박근혜정권의 몰락 또한 위정자의 사욕에서 시작된 것이며, 문고리 3인방을 비롯한 김기춘, 우병우, 안종범 등은 환관이나 내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고염무도 『일지록』에서 나라가 망하는 것은 다스리는 사람과 나라 이름이 바뀔 뿐이지만 천하가 망하는 것은 도덕과 정의가 막히고 마침내는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천하를 지키는 일은 필부처럼 천한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했다. 뒷날 양계초는 이 같은 생각을 ‘천하의 흥망은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天下興亡 匹夫有責)’는 말로 정리해 냈다. 고염무의 입장에 서면 세월호 유가족을 헐뜯도록 관변단체들을 지원하고 블랙리스트로 예술인과 학자를 관리했던 행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게 하는 일이었다. 

필자는 촛불집회를 보며 황종희와 고염무를 떠 올렸다. 촛불집회에서 만난 사람 모두는 이름 없는 匹夫匹婦였지만 천하 흥망의 책임을 몸으로 구현해 낸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간절한 소망이 독선과 무능의 정권을 끌어내리고 새 날을 여는 힘이었다. ‘배를 띄우는 것도 물이고 뒤엎는 것도 물’이라고 했던 순자의 말처럼 대한민국을 망친 것도 이 시민들이고 망가진 대한민국을 바로 잡은 것도 이 시민들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얻은 자신감이야말로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일 것이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촛불집회에서 많이 불렸던 노래 가운데 하나가 윤민석 작사 작곡의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이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겨우 네 줄짜리 노래이지만 그 안에 모든 참가자들의 바람과 의지가 담겨 있다. 그래서인지 노래를 부르며 훌쩍이는 사람들이 많았고 필자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초등학교 시절 감명 깊게 보았던 책 가운데 『정의는 이긴다』라는 책이 있다. 50여 년 전 일이라 내용도 기억나지 않지만 제목이 지닌 의미만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다 새해에는 파사현정의 본래 뜻처럼 마음 속 어둠을 몰아내고 참마음으로 다시 나는 해가 되기를 희망한다. 단식하는 세월호 유족들 앞에서 보상을 들먹이며 비아냥거리고 보란 듯이 폭식을 일삼던 무리들, 국정농단에 가담하고서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무리들, 틈만 나면 다시 본색을 드러낼 사이비 언론과 권력에 빌붙어 행세하던 학자들. 우리는 이들을 가리켜 ‘짐승만도 못한’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새해에는 그들도 다시 예의염치를 지닌 사람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고,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으며,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만천하에 실현해 내야하지 않겠는가.

 

김교빈 호서대·철학
성균관대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를 받았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장, 인문콘텐츠학회장, 학술단체협의회 상임대표, 민족의학연구원 원장, <교수신문> 편집기획위원, 뉴욕주립대와 비엔나대 연구교수를 지냈다. 현재 한국철학회 회장,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학술단체협의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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