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분노한다’
‘나는 분노한다’
  • 이기홍 논설위원
  • 승인 2017.12.26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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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내가 근무하는 ‘회사’에서 며칠전 2016년의 사원들의 실적 평가를 비공개로 발표했다. 지정된 사이트에 접속했더니, 연구 부문 B등급, 교육 부문 B등급의 평가 결과가 나타났다. C등급을 없애고 S등급을 새로 만들었으니, 나는 연구나 교육에서 영락없는 C급 사원이었다. 견딜 수 없는 모멸감과 치욕감이 밀려들었다.

이 회사에 근무한지 30년 가까이 됐지만, 지금껏 나는 나 자신을 C급 사원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2016년 만해도 나는 연구재단에서 ‘우수’ 학술지로 평가받은 사회학 분야의 두 학술지에 논문을 한편씩 발표했다 (‘우수’ 운운하는 것은 그런 낙인에 공감하거나 동조하기 때문이 아니라, 평가를 좋아하는 ‘그분들’의 선호와 기준을 존중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쪽 업계에서는 1년에 논문 1편 정도를 발표하면, 탁월한 연구자라는 평을 받지는 못하지만, 무능하거나 게으른 연구자로 취급받지는 않는다. 교육에서도 나는 학생들한테 수업부담이 많다거나 내용이 어렵다는 불평을 듣기는 하지만 배운 것이 없다거나 나태하다는 뒷담화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회사는 나를 C급 사원으로 등급매긴 것이다. 인정할 수 없었다. ‘너는 내게 모욕감을 줬다!’

동료교수들의 등급이 궁금해졌고, 이 인간들이 무슨 술수를 쓴 것은 아닌가 의심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혹시 처리과정에 무슨 부정이 개입했거나 ‘산출공식’에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신도 생겨났다. 내가 C급 사원이 된 것은 순전히 ‘상대평가’ 제도 탓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제 사회과학 쪽에서도 연구공장을 가동하는 연구자들이 적잖게 등장했다. ‘사회과학철학’을 전공하는 내가 외부연구비를 ‘수주’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교육 평가에 대학원생 지도와 배출 항목이 있는데, 지방 대학 사회학과에서는 대학원생이 끊어진지 이미 오래됐다. 내가 전공을 바꾸고 공장을 돌리지 않는 한, 사회학이 철없던 한때의 황금기로 돌아가지 않는 한 내가 (사원의 40%를 차지하는) C급을 벗어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S등급 사원들에게는 ‘사장’이 식사 대접까지 하는 회사에서, C급 낙인은 급료를 비롯한 온갖 처우에서 굴욕감을 유발한다. 갑자기 회사에 대해 염증이 생겼다.

대학에서 이런 실적 평가가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갖는지 나는 추정할 수가 없다. 시간을 독촉하고 분량을 압박한다고 연구와 교육의 성과가 높아지는가? 무능한 탓이겠지만, 나는 책 한권을 7여년에 걸쳐 쓰면서 수도 없이 틀을 뒤집고 내용을 갈아엎었다. 내가 납득할 수 없는 글을 발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학생들의 ‘필요’에 맞춰 수업을 더 편하게 진행하고 싶은 유혹과 나는 학기마다 싸웠다. 선생이 되어서 학생과 ‘담합’할 수는 없었다. 교수에게 성과를 강조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우리가 돈이 없지 자존심(가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한국의 대학들은 무분별하게, 아니 앞 다투어 갖가지 평가제도를 고안하고 기묘한 척도들을 개발한다. 당연히 이런 광풍의 선두에는 대학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교육부가 버티고 있다. ‘평가를 하지 않으면 기재부가 예산을 배정하지 않는다’던가. 그렇다면 기재부만 있으면 충분하지, 교육부는 왜 존재하는가. 평가제도는 밥값을 하기 위해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하는, 그러나 학문 연구와 교육이 어떻게 발전하는가에 관해서는 무지한 교육부와 대학의 행정 관료들, 그리고 그들을 따라 곡학아세하는 ‘전문가들’이 마구잡이로 만들어낸 ‘적폐’ 중의 하나라고 나는 판단한다. 교수들을 개별화하고 원자화하며 모멸감과 굴욕감을 유발하며 서로 경계하고 의심하게 만들고, 직장에 대한 분노와 염증을 촉발하는, 그래서 학문공동체를 산산이 박살내는 실적 평가의 목적은 학문 발전이 아니라 교수에 대한 통제와 압박, 길들이기라고 나는 확신한다.

상상력을 억압하고 실패를 금지해서는 학문은 발전할 수 없다. 대학은 ‘회사’가 아니다.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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