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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과 기억, 그리고 시냅스
경험과 기억, 그리고 시냅스
  • 정지혜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17.12.2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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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정지혜 편집기획위원/건국대·신경생물학

이미 대중적으로도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뇌세포의 대부분은 다시 만들어지지 않는다. 태어나서 몇 년 사이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뇌세포로 사람들은 평생을 산다. 뇌세포는 만들어지지 않지만, 뇌세포들이 만드는 연결 부위, 그러니까 시냅스는 매순간 매초 바뀐다, 경험이나 환경에 따라서도, 또 감정에 따라서도. 일반적으로 사람은 수백억 개의 뇌세포를 갖고 있는데, 뇌세포 하나가 평균적으로 천 개 정도의 시냅스를 맺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니, 사람들은 수십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시냅스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비슷한 숫자의 뇌세포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서로 다른 감정을 갖는 것은 각자 경험해온 바가 달라서, 완전히 다른 시냅스 지도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칼럼을 읽는 독자들의 뇌에서도 시냅스들은 빠르게 재구성되고 있다, 변화된 시냅스들이 얼마나 지속되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지만.

경험은 중요하다. 독서와 같은 추체험도 물론 가능하고 중요하지만, 직접 체험하기 전에는 잘 알지 못하는 일들이 있는 법이다. 아마도 직접 경험에 노출되어 모든 감각 신호들을 통해 전체 뇌의 시냅스들이 재구성되는 것에 비해 추체험을 통해 변화될 수 있는 시냅스의 재구성 정도는 한계가 있을 테니 말이다.

많은 일이 있었던 한 해였다. 칼럼 마감일인 12월 20일이 더 이상 휴일이 아닌 것부터 시작해서, 뉴스에서 늘 웃으며 자신만만하던 얼굴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초췌한 낯빛으로 카메라에 잡혔다. 청원사이트의 접속이 폭주하고, 언론사 사장이 일반 시민들이 아는 제작 PD로 바뀌었다. 아직 단언하긴 이르지만 직접 현장에서 오래 방송을 직접 만들던 제작 PD의 방송국은 분명 다를 것이다. 그의 경험이 그대로 그의 시냅스에 각인되어 있을 테니.

대학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올해 대학에서는 정규직 고용 증대를 이유로 내세워 각 학과 조교들을 없애는 사업을 시작했는데, 하필 본 단과대학이 시범 사업 대상이었다. (비정규직인) 학과조교가 없으니 공문도 학과장이 직접 써야 하는 등, 학과의 크고 작은 행정 일의 최종 담당자가 학과조교에서 학과장으로 바뀌었다. 통합단과대학 행정인력은 교무처, 관재처, 입학처 등 교내 대외부처 업무를 주로 담당한단다. 교수들은 각종 행정 업무를 하면서 동시에 강의, 학생 상담, 연구 논문과 연구비, 특허 및 사업화 실적이라는 항목의 점수를 모두 채워야 한다.

신임 교수들에 대한 부당한 요구 역시 올해 더 가중되었다. 전체 교수의 15% 정도인 조교수들은 연구실이 배정되기도 전에 정교수들에게 요구되는 기준보다 3배 가까이 되는 연구논문을 작성해야 하고, 행정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액수의 연구비를 수주해야 하는 데다, 강의 시수에 행정업무, 학생 상담까지 모두 한 건 한 건 점수화된다. 이는 어느 특정 몇몇 대학의 문제가 아니다.

기억의 정의는 학문분야의 숫자만큼 다양하겠지만, 신경생물학에서 기억이란 특정 사건이나 자극에 의해 변화된 시냅스의 연결이나 세기가 아주 오랫동안 유지되는 것으로 정의된다. 한 경험에 의해서 변화된 시냅스가 (이후의 다른 여러 경험에도) 계속해서 변화된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 기억인 셈이다.

대학의 행정 구조 변화와 업적 평가 시스템을 기획한 사람은 이런 어려움들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아 알 수 없었거나, 혹은 너무 오래되어 (또는 이후의 다른 여러 경험들에 의해) 시냅스가 다시금 재구성되어 잊은 것일 게다. 비정규직 학과조교의 처우를 개선하거나, 막 자리를 잡아 어려움이 많을 신임교수를 배려하는 방안은 왜 제시되지 않았을까. 이는 꼭 비용 등 경제적 이유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직접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간접경험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정책들은 아예 논의조차 되지 않을 일이다. 소수 기획진이나 그룹 대다수의 경험 부재나 망각은 많은 삶과 사회에 영향을 끼친다.

한 해의 마지막 칼럼이 개인적으로는 첫 번째 칼럼이 되었다. 연말이 되니 (평소보다 세로토닌이 많이 분비되어) 새해 계획을 세우는 설렘과 들뜬 기분도 들지만, 내년도 올해와 비슷할 것을 생각하면 답답한 마음도 든다. 잊지 말아야 하는 일들을 잘 기억하는 것이 2018년을 조금은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어떤 경험과 기억이 시냅스에 새겨지는 한 해를 보냈든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은 잊지 않을 수 있으면 한다.

 

정지혜 편집기획위원/건국대·신경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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