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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문제를 ‘문제화’ 하는 정치철학적 시도
새로운 문제를 ‘문제화’ 하는 정치철학적 시도
  •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 승인 2017.12.26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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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을의 민주주의: 새로운 혁명을 위하여』 진태원 지음 | 그린비 | 480쪽 | 20,000원

 

이 책은 내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인문한국)연구단에 근무하는 기간(2008~2017) 동안 썼던 12편의 논문을 묶은 책이다. 전체 3부로 구성된 이 책의 1부는 1980년대의 민중시인 김남주를 다루는 글과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고찰하는 글, 세월호 참사에 관해 성찰하는 글로 이뤄졌다. 이 세 편의 글은 겉보기에는 별로 연관성이 없을 것 같지만, 사실은 뚜렷한 주제 상의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민중의 분할이라는 문제, ‘과소 주체’로서의 민중, 이질적이고 갈등적인 을들의 집합으로서의 민중이라는 문제다. 그리고 이는 이 책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를 이룬다.

내가 ‘을의 민주주의’라는 주제를 본격적인 연구 주제로 구상하게 된 것은 2014년 4월 16일 일어난 세월호 참사 이후였다. 이미 그 이전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점점 더 확대되는 양극화, 치열한 생존경쟁, 약소자들에 대한 배제와 혐오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고, 이를 자조하는 이들의 한탄과 신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지만, 내가 그것을 하나의 문제로 인식하게 된 것은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였다.

 

몇 가지 질문의 기원

우리 시대의 비극 세월호 참사는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구성하는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하게 해주었다.
첫째,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갑질에 기반을 둔 나라인지 대중적인 자각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됐다. 참사 당시 많은 시민들이 ‘이게 나라냐’하는 자조어린 울분을 표출하면서 또한 ‘우리를 위한 나라는 없다’, ‘가난한 나를 위한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자각하게 됐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은 바로 을 또는 을의 자식들이었으며, 참사 이후에도 이들은 정부 및 당시 여당 그리고 주류 언론으로부터 외면과 경원, 심지어 비난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또는 그것을 대표하는 정부는 을을 위한, 을에 의한, 을의 국가나 정부가 아니라 철저하게 갑의 이해관계에 기반을 둔 국가였던 것이다.

둘째,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과연 정치공동체로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됐다. 해방된 지 7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분단과 6·25 전쟁, 독재와 산업화, 민주화, 외환위기 같은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아직까지도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가 어떤 이념을 갖고 있는지, 이 나라가 추구하는 공동의 가치는 무엇인지 뚜렷하게 제시된 바가 없다. 나라 전체와 국민들 각자는 먹고사는 일, 좀 더 잘 먹고 잘 사는 일 이외에 다른 가치를 추구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세월호 참사는 이러한 질문을 우리가 더 이상 외면하거나 미뤄둘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셋째, 그런데 세월호 참사는 또한 을들 사이의 분열과 경쟁이 우리 사회에 보편적으로 확산돼 있음을 드러내주었다. 많은 이들이 참사에 가슴 아파하고 어린 넋들과 그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세월호 참사를 외면하거나 조롱하는 일들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는 최근 논란이 되는 혐오 담론과 ‘젠더 전쟁’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드러내준 이 세 가지 현상은 현재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의 본질을 드러내주는 증상들이라는 것이 내가 보여주고 싶었던 점이다. 우리나라 국민의 대다수가 포함돼 있는 을(또는 ‘을의 을’)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의 조문이 무색하게 주권적인 주체가 아니라 갑질의 피해자이자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다른 을들과 대립하고 그들을 혐오하거나 공격하는 분열된 소수자들/약소자들인 것이다. 이러한 을들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러한 민주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존에 사용하는 주요 개념들(주권, 대표, 국민, 인권, 시민권 등)을 어떻게 개조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을의 민주주의’의 화두의 핵심을 이룬다.

내가 보기에 이러한 문제의식은 현대 정치철학을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게 해준다. 2부에서 푸코, 아렌트, 랑시에르, 네그리 같은 현대 정치철학자들과 더불어 특히 에티엔 발리바르의 이론을 검토하면서 보여주려고 했던 점이 이것이다.

지난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에 소개된 ‘포스트 담론’은 한국 인문사회과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1980년대 마르크스주의 및 민중 담론에 내재한 교조주의와 본질주의를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 사회가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되면서 표출된 양극화, 비정규직화, 생존경쟁의 첨예한 현실에 대해서는 둔감하고 맹목적이었다. 따라서 데리다, 들뢰즈, 푸코의 뒤를 이어 지젝, 네그리, 바디우, 랑시에르, 아감벤 같은 좌파 담론이 소개되고 널리 읽히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도구가 되고 실천적 투쟁을 위한 길잡이가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것은 오히려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 현상, 곧 우리 사회의 비판 사상이 영미 학계의 담론에 더욱 더 종속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는지 질문해보게 된다.

더 나아가 한국 진보 이론은 마르크스주의 및 민중 담론 이후 우리 사회를 어떻게 개조해야 하는지, 어떤 가치와 이념을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지 제대로 제시해주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널리 주목받은 최장집 교수의 한국 민주주의론은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심각한 양극화의 현실을 설명하고 ‘촛불혁명’의 정신을 담아내기에는 너무 협소하고 편향된 자유주의 이론이라는 점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반면 다른 진보 학자들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비판하면서 그 반민주주의적인 성격을 밝히는 데 기여했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제시해준 바가 없다. ‘촛불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지 1년여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것의 역사적·이론적 의미를 밝히려는 노력도 충분히 전개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를 사유하는 철학적 ‘아포리아’
나는 3부에서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통해 이러한 문제의식을 전달해보려고 했다. 3부는 을의 민주주의를 본격적으로 탐색하는 세 편의 글로 이뤄져 있다. 공교롭게도 모두 <황해문화>에 처음 실렸던 이 글들은 을의 민주주의를 잘 정의된 개념이나 체계적인 이론이 아니라 하나의 화두로, 또는 하나의 아포리아(aporia)로 제시하고 있다.

‘을을 위한, 을에 의한, 을의 민주주의’라고 간략하게 요약해볼 수 있는 을의 민주주의는 한편으로 극소수의 갑에 의한 부의 독점과 대다수 을의 삶의 불안정과 빈곤화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을을 위한 정책을 더 많이, 더 체계적으로 전개해야 함을 주장한다. 또한 이것이 단순한 시혜적인 정책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을에 의한 민주주의, 곧 을의 이해관계, 을의 목소리가 더 잘 재현되고 더 많이 대표되는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을의 민주주의는 을들 자신이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때의 ‘을’이란 누구인가? 단순한 시혜의 대상도 아니고 대표자들에 의해 잘 대표되고 잘 재현돼야 하는 대표와 재현의 대상에 국한되는 것도 아닌, 그 자신이 넓은 의미의 정치의 주체가 돼야 하는 이 ‘을’은 어떤 주체인가? 이미 구성돼 있는 실체도 아니고 단일한 주체도 아닌, 이질적이고 분열된 다양한 개인들과 집단들로 이뤄진 그것이 어떻게 주체화될 수 있는가? 이것이 이 책에서 내가 전달하려는 궁극적 질문이다.

따라서 『을의 민주주의』는 이미 존재하는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안하려는 책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문제화하려는, 새로운 개념을 구성해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아직 갈 길이 멀고 험하지만,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가 새로운 토론과 논쟁을 촉발하고 진전된 논의로 이어지기를 희망해본다.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철학
연세대에서 공부하고 서울대에서 스피노자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알튀세르 효과』(편저), 『스피노자의 귀환』(공편), 『포퓰리즘과 민주주의』(편저) 등의 책을 썼으며, 『마르크스의 유령들』, 『스피노자와 정치』, 『불화: 정치와 철학』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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