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고조선 연구 위한 문제제기"…고고학계 문헌사학계 토론 필요하다
"본격적인 고조선 연구 위한 문제제기"…고고학계 문헌사학계 토론 필요하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7.12.22 2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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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 ‘왕검성’ 요동반도설 제시한 정인성 영남대 교수

“고고학적 견지에서 ‘왕검성 대동강북안설’은 지금으로서는 폐기해야 마땅하다.” “위만조선 왕검성은 오히려 요동반도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군현이 설치되면서 대동강 유역권으로 옮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위만조선과 왕검성은 (요동반도의) 성곽네크워크의 조사연구를 통해 그 모습을 분명히 드러낼 것으로 기대한다.”-정인성 영남대 교수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을 두고 역사학계가 정설로 받아들여왔던 ‘왕검성 대동강북안설’에 다시 새로운 반론이 제기됐다. 왕검성은 평양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고조선 종말까지 요동반도에 있었다는 학설이다. 발신지는 문헌사학계가 아니라 고고학계였다. 지난달 11월 3일부터 이틀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제41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에서 정인성 영남대 교수가 제출한 학설이다. 정 교수는 도쿄대에서 일제강점기 평양 출토 낙랑 유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영남대박물관 관장을 겸하고 있다.
정 교수는 2004년에 발표했던 자신의 논문 「樂浪土城의 「滑石混入系」 土器와 그 年代」(<백제문화> 40)의 ‘낙랑토성’ 반량전 거푸집을 의식해 기원전 2세기 중후반으로 봤던 연대관을 새로운 자료 분석을 통해 수정해 이번 발표 논문 「고고학으로 본 위만조선과 낙랑」에 담아냈다. “토성리토성(낙랑토성)은 그 출토유물로 보아 낙랑군 설치에 즈음해 축성한 성곽이라고 판단된다. 결국 일제강점기 이래로 많은 연구자들이 지지했던 대동강이북에서 이남으로의 ‘이동설’은 고고학적으로 판단하건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이번 논문은 ‘세죽리-연화보 문화권이 위만조선의 기층문화라고 판단’했던 2014년 논문 「燕式土器文化의 擴散과 後期古朝鮮의 토기문화」(<백산학보>)에서 한 단계 더 들어갔다. ‘왕검성 요동설’을 제기한 정 교수를 이메일로 만났다.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 지난달 열렸던 41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의 주제는 ‘고고학으로 본 고조선’이었다. 한국고고학회 평의원으로 이번 학술대회 기획에도 참여하신 것 같다. 고조선의 영역과 실체는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의 가장 민감한 쟁점거리다. 그런데도 전국 학술대회에서 ‘고조선’을 대놓고 주제로 삼을 수 있었던 데는 고고학계 내부의 학문적 축적이 작용하는 것 같다. ‘고고학으로 본 고조선’을 주제로 내건 배경이 궁금하다.

“과거 인간이 사용했던 물질자료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고고학의 특성상 중국 동북지역과 서북한지역을 무대로 전개된 고조선이나 낙랑 문제는 한국고고학에서 다루기 어려운 주제였다. 직접 만지고 관찰할 수 있는 자료가 제한적이라는 이야기이다. 해방 전에는 일본고고학자들의 독무대였고 해방 후에는 북한고고학자들이 주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2000년대가 되면서 강점기 일본인 연구자가 남긴 서북한지역의 고고자료를 국내연구자들이 직접 관찰할 수 있게 되자, 중국 동북지역의 현지답사에서 얻은 고고학적 정보에 대한 해상도도 아울러 높아졌다.  이런 기초이해의 향상은 문헌사료에만 의지했던 고조선과 낙랑군 연구를 한국고고학의 시선으로 살펴서 검증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었다. 여기에 한국고고학회가 창립된 이후 단 한번도 고조선 문제가 정식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반성이 더해져서 기획된 학술대회였다.”  

 

△ 이번 전국대회에서 같은 학과 이청규 교수도 발표논문 「종족·민족의 형성과 고조선」을 통해 고조선이 “요동반도 서쪽을 흐르는 강인 랴오허(遼河)부터 북한 서부까지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특히 선생님께서는 ‘왕검성=평양 통설’을 뒤집는 학설을 제안했다. 고고학계 100년 통설이자, 역사학계 주류 학설에 대한 ‘고고학적 반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주장을 제기하는 데 100년이 걸린 셈이다. A4 27쪽 분량의 논문에 정밀한 분석을 담았는데, 타 분야 전공자를 위해 이번 ‘학설’을 간략히 설명해 달라.

“강점기 일본인 연구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해방 후에도 연구자들의 지지를 받았던 왕검성 후보지는 대동강 북안의 ‘평양성터’였다. 그런데 따져보면 그 근거는 빈약하기 짝이 없다. 오로지 『史記』 朝鮮列傳의 기록에 의지하는데 한의 침략군이 왕검성을 공격하는 방향에서 나온 추정이었다. 아래의 기사가 그것이다.


좌장군이 패수 상군을 격파하고 전진하여 성 아래 이르러 서북쪽을 포위했다. 누선도 또한 합세하여 성의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끝내 성을 굳게 지키므로 몇 달이 되어도 함락시킬 수 없었다.(左將軍破浿水上軍乃前至城下其西北. 樓船亦往會居城南. 右渠遂堅守城數月未能下.)


수군이 남쪽에서 공격하고 좌장군이 성의 서북쪽을 포위할 수 있는 지형이라는 기술이 중요하다. 여기에 위만조선의 강역과 낙랑군, 조선현의 소재지가 동일하다는 이해가 더해졌다. 그 설명의 원류를 따라가면 北魏時代 역도원이 쓴 『水經注』에 이른다. 후대의 기록인 수경주임에도 연구자들은 평양을 낙랑군으로 인정하고 낙랑군 조선현을 왕검성과 등치시켰다. 이를 근거삼고 발굴성과를 더하여 일제강점기에 공고해진 <樂浪郡平壤說>에 더하여 <衛滿朝鮮(왕검성) 平壤說>마저 굳어졌다. 
문제는 평양성에서 낙랑군 이전으로 소급되는 유구나 유물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연구자들은 평양성과 그 주변이 위만조선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도시로 점유되었던 까닭이라고 한다. 즉 평양성이 정식 발굴되면 그 아래에서 위만조선대의 유물이 쏟아질 것이라 기대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래로 평양성은 여러 차례에 걸쳐 고고학적인 조사가 있었다. 이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사례가 없었는데 이번에 체계적으로 살핀 결과 고구려 이전으로 소급되는 자료는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평양성 외에 대동강 북안에서 발견된 그 어떠한 성곽자료에서도 위만조선 병행기의 고고자료가 발견된 바 없다.
이러한 고고학적 상황을 의식하여 위만조선과 왕검성의 후보지를 대동강 남안에서 찾는 분위기도 있다. ‘낙랑토성’이 그것인데 아쉽게도 연대를 알 수 있는 화폐자료와 청동거울 등은 모두 낙랑군 병행기에 한정된다. 대동강 남안이라면 믿어 의심치 않었던 『사기』 조선전의 기록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문헌사료와 고고자료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불일치는 위만조선과 낙랑군을 동일한 지점이라 보는 전제를 바꾸지 않는 이상 해결할 수 없다.
한편, 문헌사료에서 드러나는 위만조선은 재지 조선인에 더해 연과 제 등지에서 이주한 주민들의 복합체이다. 그러나 대동강유역에서는 연과 제를 암시하는 고고학적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비파형동검에서 세형동검으로 전개되는 고조선 특유의 청동기문화에 연국과 제국에서 이입된 문화요소가 어우러져 독특한 지역문화를 형성한 곳은 요동반도에서 구해지기 때문에 발상을 전환하여 위만조선과 왕검성의 후보지는 요동반도에서 구한다면 고고학적인 견지에서는 보다 정합성이 인정된다.”

 

△ 당장 문헌사학계에서도 이의를 제기하는 것 같다. “발굴하지 않은 평양 성곽들이 남아 있다. 물증이 없다고 단정하는 건 거친 해석이다” “요동에 왕검성이 있었다면, 역사적으로 확증된 한나라 요동·요서군 위치도 수정해야 하는데, 근거를 댈 수 있을지 의문”(윤선태), “요동 왕검성을 함락시켰다면 왜 수천리 떨어진 평양에 굳이 낙랑군을 뒀는지 납득할 만한 설명이 필요하다”(오영찬) 등의 반론이 있는데, 어떻게 보는가.

“윤선태 교수가 말한 발굴되지 않은 평양지역의 성곽은 [청암리토성]을 지칭한다. 그런데 청암리 토성의 내부는 이미 해방 전부터 부분 발굴이 이루어졌다. 물론 발견된 것은 고구려 유구에 고구려 유물로 한정된다. 왕검성으로 점유된 시설이라면 발굴과정에서 고구려 이전의 유물이 반출되어야 하나 그러한 정보는 없다. 해방 이후 북학고고학계의 조사에서도 고구려 이전의 정보는 확보되지 않았다.   
물증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거친 해석이라고 하는데, 물증에 기반한 해석은 고고학의 기본이다. 오히려 100년 동안 물증이 확보되지 않는 현상이 더욱 중요하다. 문헌사학계에서도 그 이유를 고민해야 될 때이다. 근대 이후 일본학계에서도 왕검성과 낙랑군치를 대체로 평양이라고 생각했지만 1913년에 뜬금없이 대동강 남안에서 낙랑토성이라는 ‘물증’이 나타나자 ‘낙랑군치이동설’을 꺼내들었다. 합리적인 해석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1930년대에 발굴조사를 거치면서 더욱 많은 연구자들이 ‘낙랑군치 이동설’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렇다며 100년동안 대동강 북안에서 평양성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고고학적 정황에 대해 문헌사학계에서 합리적인 반응을 해야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민족의 거점에 군현을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예외도 있었다. 민월을 정복한 다음 한무제는 원거점과는 동떨어진 복건성의 해안에 군현성을 설치하기도 했다.”

 

△ 논문에서 눈길 끈 대목 가운데 ‘요동의 성곽네트워크 조사 연구’ 제안이 있다. 이들 지역의 출토유물이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는 지적인데, 선생님께서 꾸준히 제기하고 있는 ‘세죽리-연화보 문화의 실체’를 이 지역에서 거듭 확인할 수 있다면, ‘왕검성=요동’설이 증명되는 것인데, 이 ‘세죽리-연화보 문화’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것이 (후기)고조선의 기층을 이룬다고 볼 수 있는 근거도 궁금하다.

“세죽리-연화보 유형은 점토대토기와 고조선식동검(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문화에 중국 전국시대 이래의 문화요소가 결합된 양상으로 나타난다. 요동반도의 중남부지역과 한반도 서북지역 언저리까지 확산되어 나타난다. 이 지역에는 수많은 토성들이 존재하는데 성곽의 내외부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중원계 유물 일색이 아니라 세죽리-연화보 유형에 기초한다.
문헌사료에서 (후기)고조선의 위치는 애매하지만 주민구성은 한결같이 망명인과 재지인의 결합을 말한다. 세죽리-연화보 유형과 가장 어울리는 기술이며 그 시기도 일치한다.”

 

△ 고대사를 놓고 역사 해석전쟁이랄까, 첨예한 시각이 맞서고 있다. 관심이 뜨겁다보니 고대사가 ‘국수주의적 시각’에 동원되기도 한다. 이런 정치적 접근은 오히려 고대사 연구를 가로막는 것 같다. 역사학계에서 고조선 연구자는 몇 안 된다. 고고학 분야에서도 한국고대고고학 전공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연구자들이 적은 건 어떻게 봐야 하나.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연구자료가 획득되는 공간이 요동지역과 서북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실물자료에 대한 접근의 어려움이 연구자가 적은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역사연구자로서 국수주의적인 시각은 고고자료를 오독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선호하는 결론을 가슴에 품은 연구를 철저하게 배격할 필요가 있다.”

 

△ 고고학이나 역사학은 물질적 증거를 우선시한다. 그러나 고대사의 시계는 문헌이나 유물, 유적이 충분하지 않아서, 빈틈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빈틈’은 개별 연구자나 연구집단 나아가 학계의 공동의 ‘상상력’에 의해 메워질 수 있을텐데(포스트모던 역사학자들의 주장처럼), 고고학은 어떤 태도를 견지하나?

“고고학은 학문 특성상 물질 증거를 우선시한다. 그러나 발견된 고고자료가 가진 대표성의 문제는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자료가 끊임없이 발굴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결국 문헌사학에서 얻어진 성과를 충분히 존중하면서 지금 확보된 고고자료를 폭넓게 비교하여 얻어지는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내릴 필요가 있다. 지금 위만조선과 관련하여 고고학과 역사학의 연구에서 발생한 가장 큰 ‘빈틈’은 문헌사료의 해석과 고고자료의 정황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지점에 있다. 고고학계와 문헌사학계가 본격적으로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시작해야 하는 이유이다.”

 

△ 어떤 계기로 고고학에 뛰어들었나? 앞으로 연구 계획은?

“고고학과에 진학하여 발굴현장을 전전하는 과정에서 고고학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낙랑과 고조선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도쿄대학에 유학하면서 일제강점기에 발굴되어 미보고된 다량의 ‘낙랑토성 발굴유물’을 지하창고에서 발견하고 연구한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한국고고학 전반을 휩쓸었던 ‘낙랑군영향설’을 검증할 수 있는 새로운 눈을 얻게 되었다. 아울러 10년 전 평양을 방문하는 행운을 얻었고 이후 오랫동안 요동지역을 여행하면서 낙랑문화요소의 시공간적 위치와 특징을 더욱 선명하게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중국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실에서 1년간의 연구년을 보내게 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때 중국 하북성 일대의 유적답사를 통해 전국시대 이래 燕國 문화의 특징을 살피게 됐고 산동지역에 대한 답사를 통해 齊國문화 요소를 아울러 학습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요동지역에 녹아있는 연과 제의 문화요소를 변별해 내게 되어 낙랑고지라 이해되는 서북한지역의 상황과 비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위만조선 왕검성을 둘러싼 새로운 주장은 20여년에 이르는 이러한 연구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번 발표는 본격적인 고조선 연구를 위한 문제제기에 지나지 않는다. 문헌사학의 중요한 성과를 더욱 학습하고 소통하면서 한국연구자의 시선에서 고조선과 낙랑문제에서 성과를 내고 싶다. 물론 왕검성 비정문제도 중요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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