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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만의 체계이론이 설득력을 갖는 두 가지 이유
루만의 체계이론이 설득력을 갖는 두 가지 이유
  • 교수신문
  • 승인 2017.12.18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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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대학은 지금_ 루만 작업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루만의 논문 모음집 『불투명성의 통제 Die Kontrolle von Intransparenz』가 지난달 13일 출간됐다. 루만 타계 이후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출간된 17번째 저작이다. 이 책은 생전에 발표된 「구성으로서 인식」(1989), 「지능 ‘체계’는 있는가?」(1992), 「인과성의 위험」(1994/5), 「시간과 기억」(1996), 「불투명성의 통제」(1998)의 다섯 논문들로 구성돼 있다. 신간 아닌 신간인 셈이다. 자기지시적인 체계이론으로의 패러다임 전환 이후인 1980년대 이래 루만 이론의 완숙기에 해당하는 시기의 논문들, 특히 그가 타계하기 직전의 논문인 「불투명성의 통제」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곧 출간될 그의 초기 사회이론과 연동해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사회의 도달 불가능성

루만은 “사회에는 주소가 없다”고 말한다. 즉 어떠한 사회도 자기 자신의 고유한 작동들로 자기 자신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학자의 이론적인 구성물로도, 특히 루만의 이론처럼 우리 시대가 도달한 가장 정교하고 복잡한 이론적 구성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사회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이론의 유용함, 또는 반대로 무용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사회는 ‘해소불가능한 불확정성’의 상태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만약 현상형식과 사물들의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을 때 이는 충분한 것이 아니다. 즉, 사회의 도달불가능성은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특정한 과학으로 지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를 인식하기 위해서 사회를 관찰할 때의 객관성은 인식의 주체에게 역사의 담지자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도달할 수 없다. 사회의 도달불가능성을 고려할 때, 사회를 초월한 지위를 갖는 주체도 없을 뿐 아니라, 사회 자체도 주체의 대상으로서, 과학의 대상으로서 고정적이고 객관적으로 파악가능한 객체이자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에서는 고전적인 인식론에서 상정하는 것처럼 지식의 축적에 따라 더 많은 확실성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축적에 따라 더 많은 불확실성이 산출되고, 강제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 체계는 투명하고, 총체적인 인식이 가능하고 그래서 그에 대한 완전한 통제가 가능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체계는 언제나 중복과 변이의 결합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 간의 일대일대응이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질서정연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원인과 결과 간의 대응관계를 생산하는 특정한 형식을 관찰하지 못할 만큼 무질서하지도 않다. 이렇게 사회적 체계는 스스로 산출한 미규정성을 획득한 체계가 될 뿐 아니라, 이 상태를 자기 인식의 조건으로 한다. 이런 점에서 체계는 자기 자신에게 ‘블랙박스’다.

『불투명성의 통제』와 사회적 체계의 작동상 폐쇄

루만의 이번 ‘신간 아닌 신간’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체계가 스스로에게 자신의 작동의 불충분함을 증명하는, 즉 체계의 자기관찰을 통해서도 자기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해소불가능한 불확정성(unresolvable indeterminacy)’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고, 이처럼 통일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조건과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체계가 자기기술할 수 있는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의 도달불가능성, 사회의 해소불가능한 불확정성에도 불구하고, 즉 사회의 불투명성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사회는 자신의 동일성을 기술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사회적 체계를 통한 사회의 인식이라는 문제로 사회학적으로 제기되는 것이다. 이 책의 편집자인 디어크 베어커는 해제에서 “불투명성의 통제의 역설로 그의 연구를 요약할 수 있다”고 이러한 사회학적인 사태를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 해제는 ‘해소불가능한 불확정성’의 논리가 스펜서-브라운의 이론에서 기반한 만큼, 재진입의 수학, 형식의 계산, 형식의 논리로 제시한 그의 이론이 갖는 루만의 체계이론에서의 위상에 대한 검토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베어커의 해제는 루만의 『사회적 체계들』의 제 1장 「체계와 기능」의 유명한 첫 문장 “다음의 숙고는 체계가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문장을 완벽히 패러디한다. 단어와 그 배열까지 일치하는 문장에서 ‘체계’의 자리만 ‘관찰자’로 대체하면서 “다음의 숙고는 관찰자가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로 시작하는 것이다. 체계의 인식, 사회적 체계를 통한 사회의 인식이 어떻게 가능하고, 또 어떻게 불가능성에 기반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를 루만의 다섯 논문 각각에 대한 상세한 해설과 더불어 일반적인 수준, 그러나 1984년의 『사회적 체계들』에서 도달한 이론적 성과에 기반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환경 안에서 자기를 스스로 새롭게 하는 선택성을 보장하는 연속적인 자기해소의 문제에 주목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이런 선택들을 제약하는 구조와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차이로서 시간적인 불연속성에 주목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적 체계들의 작동상 폐쇄의 문제이기도 한데, 1997년의 『사회의 사회』에서 루만은 이를 “기능적 분화는 자기지시를 포함하는 기능체계들의 작동상의 폐쇄에 기초한다.

이것은 기능체계들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산출한 미규정’ 상태에 처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그 결과 체계복잡성은 항상 두 면을, 즉 이미 규정된 면과 아직 규정되지 않은 면을 갖는다. 이것은 체계의 작동들에 아직 규정되지 않은 것을 규정하는 기능을, 그리고 동시에 미규정성을 재생하는 기능을 부여한다”고 확인하고 있다. 베어커에 따르면 이는 루만의 이론에서 언제나 자기지시적인 작동으로서 관찰자의 구별의 문제와 관련된다. 불투명하고 불투명한 것으로 있는 체계가 투명성을 순간적으로 획득하게 되는지의 문제는 형식의 문제, 자기지시의 역설의 전개라는 문제, 배제된 것의 포함이라는 커뮤니케이션의 문제, 의미론의 문제로 이론적으로 재확인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그가 놓치지 않고 지적하는 것처럼, 사회의 이론은 어떻게 사회가 환경과의 차이 속에서 다맥락적인 체계(polykontexturales System) 로 이해될 수 있는지의 문제이기도 하고, 의미를 갖는 커뮤니케이션의 포함과 배제라는 반복되고, 교차되는 관계의 문제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론적 일반성이라는 이념

이 시기 루만의 작업에서 스펜서-브라운의 이론은 형식, 시간 그리고 관찰이라는 자기지시적인 작동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에 이 작업의 위상을 검토하는 것은 루만 이론을 확장하고, 그 일반성의 수준을 획득하는데 중요하다. 스펜서-브라운의 ‘형식의 계산’은 시간에 대한 급진적이고 탈존재론적인 주제화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짐멜 이래 사회학의 핵심범주가 된 형식 역시 ‘시간화 된 형식’이 된다. 그러나 루만의 이론이 갖는 탈존재화하는 역량은 비단 시간 범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구성하는 사태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형식의 계산과 그 논리가 중요한 만큼 의미를 갖는 커뮤니케이션에서 포함과 배제의 문제가 중요한 이유다. 물론 이 차원들은 서로 무관하게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사회적 체계가 작동하면서 자기관찰하고 자기기술하는 문제로 기능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복잡성의 시간화의 구조와 의미론 뿐 아니라, 복잡성의 물질화와 사회화의 구조와 의미론 역시 사회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베어커는 체계의 작동상의 폐쇄를 ‘이념(die Idee)’이라고 하면서, 스펜서-브라운의 형식의 논리 역시 이런 ‘이념’이라고 지적한다. 루만은 스펜서-브라운을 수용한 이후인 1980년대 초반 이후에야 기능적으로 분화된 체계의 작동과 그 역설을 이론화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의 작업의 초기부터 갖고 있던 근대사회의 기능적 분화, 이후에는 사회적 체계의 작동상 폐쇄라고 정식화하게 되는 토대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루만의 입장은 이미 초기에 ‘규정할 수 있는 것과 연관된 부정’의 작업이 있기 때문에, 그 기반 위에서 스펜서-브라운의 이념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정확하고, 그리고 섬세하게 지적한다. 1975년까지의 미출간 원고에 기반 한 『사회의 이론』은 이를 풍성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회학적인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루만의 이념은 스펜서-브라운의 이론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 아니라, 이 기반이 스펜서-브라운의 형식의 이념을 통해 보충되고, 확장되고, 급진화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회의 도달 불가능성은 사회의 진화 자체가 보여주는 것이지 어떤 특정한 형식의 논리가 독점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곧 이어 베어커는 루만의 후기 작업들은 하인츠 폰 푀어스터의 이차 질서의 사이버네틱과 고트하르트 귄터의 多價値의 논리가 ‘동등하게’ 이론적인 자원이라고 역시 정확하고 타당하게 정리하고 있다. 이 모두가 체계의 작동상 폐쇄라는 ‘이념’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루만 이론 안에서 관찰의 이론적인 지위를 확인할 수 있고, 루만이 말년에 작업한 ‘불투명성의 통제’라는 테마가 이렇게 이론적인 일반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사건화 능력과 이론적인 정직함

루만의 이론적 일반성과 이를 구성하는 이념들은 근대사회의 도달불가능성, 그리고 ‘불투명성의 통제의 역설’과 관련돼 있다. 근대사회는 어떠한 이론, 또는 이론적인 일반성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언제나 이를 초월하는 것이어서 자기 자신에 대한 무수한 관찰들을 하고, 또 그러한 자기관찰과 자기기술을 작동의 차원에서 강제하기 때문이다. 베어커의 지적처럼 “루만의 체계이론은 사회적 체계와 심리적 체계의 사건화능력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이차관찰의 유동성이라는 맥락에서 형식의 계산으로 보충되는 것이지 대체되는 것이 아니다.

통념상 체계의 대립물로 상정하는 사건을 체계의 작동으로 이론화하는 것, 즉 사건이 사건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체계의 사건화능력이 요구되며, 이를 사회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루만 이론이 갖고 있는 이론적인 정직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직함과 건조함 때문에 루만 이론의 설득력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김건우 독일통신원/빌레펠트대 박사과정·사회학
필자는 칼 슈미트와 니클라스 루만의 국가이론과 공법이론을 비교, 종합하는 작업을 통해 민주주의와 국가의 내적인 연관을 사회학적으로 조명하는 국가사회학을 연구하고 있다. 루만의 저작 『근대의 관찰들』과 『체계에서의 권력』 등을 번역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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