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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卽位년도 , ‘三國史記’가 정확하다”
“광개토대왕 卽位년도 , ‘三國史記’가 정확하다”
  • 이지영 기자
  • 승인 2003.05.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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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쟁점] 고대사 연구와 史料 해석

현행 고구려사 연표가 잘못됐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것은 사학계에서 사료적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왔던 ‘삼국사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제기된 주장이라 논쟁의 가능성도 엿보인다.
서병국 대진대 교수(사학)는 최근 모악실학회에서 발행하고 있는 ‘실학사상연구’ 제22집에 ‘호태왕릉비소재 영락연호 사용과정’이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주요 내용은 광개토대왕의 즉위연도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과 광개토왕릉비에 기록된 고모루 산성이 경기도 포천의 고모리 산성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陵碑’ 기록 맹신한 통설에 대한 반론

현재 국내에서 통용되고 있는 고대사 연표는 진단학회가 정리한 것이다. 이 중 고구려사 부분은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을 바탕으로 했다. 광개토대왕릉비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기록된 내용이 서로 조금씩 다르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그대로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광개토대왕의 연호인 ‘영락’이 신묘년(391)부터 사용됐다고 기록돼 있는 반면, 삼국사기에는 임진년(392)에 광개토왕이 즉위했다고 서술돼 있다. 즉 광개토대왕의 즉위년도에 1년의 時差가 발생한다. 이 두 기록 중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이 삼국사기의 것보다 정확한 사료로 판단, 신묘년에 광개토대왕이 즉위했다고 보는 것이 지금까지의 학계 시각이었다.

그러나 서 교수는 ‘영락’ 연호가 사용된 것은 신묘년이 확실하나, 광개토대왕의 즉위는 임진년이라는 주장을 새롭게 내놓았다. 광개토대왕릉비에 실린 광개토대왕의 정복 기록 중 영락 6년 조의 백제 토벌 기록과 ‘삼국사기’의 광개토대왕 백제 토벌기사와 비교해 보면 많은 부분이 상치되는데, 이들을 비교·분석한 결과 삼국사기의 기록이 옳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서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신묘년부터 태자였던 담덕(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유고를 당한 것으로 보이는 고국양왕을 대신해 백제·왜와의 전쟁을 지휘했으며, 그 결과 고구려를 매우 강성한 군사대국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에 신묘년을 영락 원년으로 잡게됐다는 것. 즉 영락 2년이 즉위 1년이 되기 때문에, 즉위를 기준으로 한 연표는 1년씩 수정돼야 하는 주장이다. 서 교수는 “광개토대왕릉비가 고구려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 때문에, 이 비의 사료적 가치를 의심하지 않고 있는 것”이라며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재위 연간의 기사 및 연표는 광개토대왕의 즉위와 사망 연대를 바르게 밝혀놓았는데도 현행 연표가 틀린 것은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을 전후 관계를 따지거나 비판하지 않고 맹신한 데서 빚어진 소산이다”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통설에 대한 꼼꼼한 반론의 미덕이다.

사실 고대사 서술에 있어, 연도의 차이는 종종 그 사례를 살필 수 있다. 후대 역사가가 나름의 기준에 따라 서술하기 때문에 몇 년간의 차이는 감안할 수밖에 없다. 또한 서 교수의 주장대로 고구려사의 연표를 1년씩 교정한다고 해서, 과거의 역사가 획기적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고구려사 서술에 있어, 삼국사기를 광개토대왕릉비보다 더 정확한 사료로 인정한 것은 학계의 정설과는 정반대의 입장인 셈. 노태돈 서울대 교수(고대사) 역시 “광개토대왕릉비가 삼국사기보다 정확한 일차 사료라는 것에 의심할 여지는 없다”라는 견해를 보였다.

‘풍납토성=위례성’설도 일치

그러나 ‘삼국사기’를 사료해석에 적용, 개가를 올린 사례가 있어, 삼국사기 기록의 신뢰도 수용 여부는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 풍납토성이 하남 백제의 위례성일 가능성을 제기한 고고학계와 재야사학계의 합동연구가 그것이다. 한국 고대사 부분을 다시 써야한다는 주장을 낳은 풍납토성 발굴성과는, 백제가 기원 전후 시기에 이미 경기도 일원을 정복한 왕국으로 발전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옳다는 것을 증명했다. 최몽룡 서울대 교수 등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에 대해 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었던 주류사학계도 이런 학설을 일부 받아들이는 등 正典으로서의 고대사 사료의 해체작업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음을 짐작케한다.

서 교수의 주장 역시 삼국사기의 고대사 기록을 사료로 인정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기가 될 것인지, 아니면 그저 異論로 수용될 것인지는 미지수다. 분명한 것은 후대 사가의 역사서술이 귀중한 사료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지영 기자 jiyou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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