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9-06-14 10:02 (금)
지금은 ‘顯正’을 강조해야 할 때
지금은 ‘顯正’을 강조해야 할 때
  •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 승인 2017.12.17 07: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破邪顯正’을 추천하며

사자성어로 올해의 한국사회를 진단한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고색창연한 옛 표현 속에 현실의 문제의식이 웅크리고 있음을 발견할 때, 필자는 세상의 오랜 이치를 새삼 깨닫는다. 이런 깨달음은 낯선 비유를 통해 익숙한 대상의 본질을 새롭게 이해하는 것과 유사하다. 지난 달 올해의 사자성어를 고민하던 때도 그랬다. 과거의 눈으로 현재의 문제를 살피다 보니, ‘파사현정’에서 ‘적폐청산’을 화두로 달려온 한국 사회의 문제의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파사현정’이 떠오르기까지 이틀 정도 걸린 듯하다. 그 시간 동안 필자는 2017년 한국 사회를 되짚으며 국면마다 회자되던 단어를 떠올려 봤다. 필자의 머릿속엔 세 개의 단어가 열쇠말로 남았다. 명사 ‘기본’, 형용사 ‘바르다’, 부사 ‘제대로’가 그것이다. 이 세 단어를 통해 올 한 해 한국 사회를 움직인 힘의 근원을 볼 수 있었다. “기본을 지키지 않아 어그러진 것들을 바로 세워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자”는 사회 구성원들의 열망을 확인한 것이다. 이 열망은 ‘바른 원칙’ 즉 ‘正法’을 세우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터. 필자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정법’이 들어간 말을 검색했고, ‘정법’을 뜻풀이에 포함한 표제어 ‘파사현정’이 눈앞에 나타났다. 

파사현정 破邪顯正 [발음 : 파ː사현정] 
파생어 : 파사현정하다 
명사 <불교> 사견(邪見)과 사도(邪道)를 깨고 정법(正法)을 드러내는 일. 삼론종의 근본 교의이다. [비슷한 말]  파현(破顯). 

‘파사현정’은 불교 용어다. 불교에서는 이 말을 ‘부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사견(邪見)과 사도(邪道)를 버리고 바른 도리를 따른다는 뜻’으로 쓴다고 한다. 그런데 종교의 가르침은 언제나 세상사에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그렇다면 ‘파사현정’으로 우리의 문제의식을 새롭게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파사현정’이 오늘날의 ‘적폐청산’ 정신에 맞닿아 있음을 깨달으며, 필자는 추천의 말을 다음과 같이 썼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시민들은 그릇된 것을 깨뜨리고 올바름을 구현한다는 마음으로 촛불을 들었고, 결국 정권교체를 통해 국정농단 세력이 어지럽힌 나라를 바르게 세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사견과 사도가 정법을 누르고 세상에 횡행하는 일이 다시는 없기를 그리고 적폐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파사현정’을 추천한다.”

사견과 사도가 정법을 가린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기본 원칙을 지키는 것이 대단한 일인 세상이 됐다.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은 정책에 대한 지지라기보다는 기본을 지키는 지도자에 대한 신뢰로 해석되기도 한다. ‘촛불’ 이전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면이 있다. 그런데 기본 원칙을 지키는 것이 특별하다는 건 문제적이다. 가진 자들의 불법 행위가 일상화돼서 그럴까? 고위공직자는 병역 기피, 논문 표절,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세금 탈루, 음주 운전 등에 연루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청백리가 된다. 기업인은 세금을 제대로 내는 것만으로도 사학재단은 교직원을 공정하게 뽑는 것만으로도 미담의 주인공이 된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여전히 위태롭다. 촛불 혁명의 열기에 삿된 존재들은 잠시 숨을 죽이고 있다.

그러나 삿된 존재들이 횡행할 수 있는 토양은 비옥하다. 기본 원칙을 지키는 것이 특별한 사회는 그들이 몸을 숨기기에 좋은 안온한 안식처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른 원칙 즉 정법을 드러낸다는 ‘顯正’은 ‘기본 원칙을 지키는 게 당연한 사회를 만든다’는 ‘적폐청산’의 궁극적 목표를 보여준다. 그러니 ‘현정’을 강조할 때 ‘적폐청산’은 검찰과 정치인만의 일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일이 된다. 결국 ‘파사현정’의 현재적 의미는 ‘破邪’에 방점이 찍힌 ‘적폐청산’을 ‘顯正’으로 보완해 ‘적폐청산’의 진정한 의미를 말해주는 데 있다 할 것이다.
이 글을 쓰며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파사현정’이 2012년 새해 <교수신문>이 선정한 희망을 담은 사자성어였음을 알게 됐다. 당시의 기사를 보니 ‘파사현정’을 추천한 김교빈 호서대 교수(동양철학)는 “올해에는 두 번의 중요한 선거가 있는데 이 선거를 통해 불의, 부도덕, 탐욕 등 옳지 못한 것은 버리고 그 자리를 정의, 배려 등 바른 것으로 채워야 한다는 뜻을 담았다”고 밝혔다. 희망으로 거론한 말을 5년이 지나 올해의 사자성어로 삼을 수 있을 만큼 우리 사회가 나아졌음에 감사한다. 때마침 2012년 부당 해직됐던 언론인들이 5년 만에 복직됐다는 뉴스가 들린다. 우리는 또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최경봉 원광대·국어국문학과
고려대에서 국어국문학 학사·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한글 민주주의』 , 『근대 국어학의 논리와 계보』 등이 있다. 한국어학회, 한국어의미학회, 한국사전학회 편집위원, 국립국어원 국어규범정비위원을 역임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