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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종의 칼의 노래
이국종의 칼의 노래
  • 김종영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17.12.15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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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김종영 편집기획위원/경희대·사회학과

애국주의와 휴머니즘의 결합. 돈이 없어 의대를 휴학하고 해군에 입대한 청년. 한국전쟁 때 지뢰를 밟아 장애인이 된 아버지를 보며 몸소 느낀 약자의 고통. 사실상 자신의 왼쪽 눈까지 잃어가며 환자를 살리려는 희생정신. 자본과 권력에 눈치 보지 않는 돈키호테적 저돌성. 해군 제복을 입고 경례하며 대통령을 ‘각하’로 부르는 충성의 아이콘. 대한민국이 아주대학교 외상센터의 이국종 신드롬을 앓고 있다. 애국주의는 우파의 이데올로기이고 휴머니즘은 좌파의 이데올로기다. 조중동과 한겨레/경향이 동시에 ‘쉴드’를 쳐줌으로써 그는 ‘까임 방지권’을 획득하고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 영웅 스토리에 反영웅이 필요했는데 의도치 않게 김종대 의원이 스스로 걸려들었다. 김 의원은 기생충 논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다수의 네티즌들에게 ‘국정감사의 용’에서 세비를 축내는 ‘의원충’으로 전락했다. 정치는 순발력이지만 잘못된 순발력은 사회의 심층적 텍스트를 읽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김 의원은 기생충도 유용하다는 서민 교수의 말을 위안 삼아 재기를 노려야 할 것이다.

이국종은 박근혜-최순실 사태로 절멸한 우파의 미래가 되었다.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그렇다. 대한민국에 진정한 우파는 없었고 생파, 곧 생존을 위해 원칙도 이념도 없는 집단만 있었다. 청와대 민정수석 조국이 좌파도 세련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면 이국종은 우파도 휴머니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대표적 우파 논객이자 작가인 김훈의 질긴 생명력은 칼(또는 武)과 휴머니즘의 결합에 기인한다. 

‘칼잡이’ 이국종의 외상센터 수술실은 전쟁터다. 그와 그의 직원들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중증 환자를 살리기 위해 말 그래도 피 튀기며 매일매일 싸운다. 이순신의 칼이 죽음의 칼이었다면 이국중의 칼은 생명의 칼이다. 그는 JSA로 넘어오다 4발의 총탄을 맞은 북한 귀순 병사를 살려내며 이 수술실을 이념의 전쟁터로 변화시켰다. 이국종 교수 스스로 말하듯 이 수술실은 한미동맹을 구현한 사회 물질적 공간이자 이데올로기적 무기다. ‘자유’를 찾아온 병사의 위태로운 ‘생명’을 건진 것은 자유대한의 우수한 의술과 한미 군인들의 협동심이다. 북한 병사의 몸에서 나온 기생충은 병들고 낙후되었으며 민중의 피를 빨아먹는 북한독재정권의 메타포다. 이 기생충을 박멸함으로써 이국종의 칼은 이순신의 칼만큼이나 위력적이고 무섭다. 이국종의 칼은 이제 생명의 칼에서 남한 체제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이념의 칼이 되었다.

하지만 휴머니즘이란 ‘노래’가 있기에 김훈의 칼과 마찬가지로 이국종의 칼도 ‘국뽕’이 되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빛, 움직이지 않는 안면 근육, 드라이한 말투. 휴머니즘이라고는 당최 느낄 수 없다.  김훈의 『칼의 노래』가 성공한 것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근엄한 무사의 내면을 탁월한 문체로 그렸기 때문이다. ‘칼잡이’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치명적 단점이다. 그는 속으로만 울어야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매일 넘나드는 사람들은 차가워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쉽게 무너진다. 칼을 잡는 순간 절도 있고 냉정하게 집중해야 하며 삶과 죽음은 잊어버려야 한다. 이국종이 보여준 정확하고 차가운 프로페셔널리즘이 우리를 안심시킨다. ‘그래, 저게 바로 의사야. 저것이 바로 프로페셔널의 삶이야.’

이국종의 휴머니즘은 그의 얼굴과 말투로부터가 아니라 그의 사회적 관계, 곧 병원의 환자들과 그의 스토리에서 나온다. 공장에서 팔과 다리가 잘린 노동자들, 생업을 이어가다 교통사고로 생명이 위독한 트럭 운전사들,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의 환자들이다. 이국종 스스로가 말하듯 그의 환자들은 대부분 ‘블루칼라 계층’이고 그의 병실은 가난이 숨 쉬는 곳이자 사회적 모순이 응집된 곳이다. 가난한 국가유공자의 아들로서 가난한 사람들이 차별받지 않고 치료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소박한 꿈이 그의 휴머니즘이다. 인간의 보편적 고통에는 좌도 우도 없으며 오로지 공감과 치료만이 필요하다. ‘사회가 아프다. 그래서 나도 아프다.’ 이것이 이국종의 휴머니즘이자 좌우를 넘어 그가 영웅으로 떠오른 이유이다. 한국 엘리트들과 우파들은 이국종의 ‘칼의 노래’를 음미하기 바란다. 이 노래 속에 보수의 미래가 있다.  

 

김종영 편집기획위원/경희대·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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