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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室보다 민중 구원 위해 제작 … 동네 꼬마처럼 해맑은 친근감 매력
王室보다 민중 구원 위해 제작 … 동네 꼬마처럼 해맑은 친근감 매력
  • 교수신문
  • 승인 2017.12.04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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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65.금동관음보살입상(金銅觀音菩薩立像)의 新例

관음보살은 大慈大悲를 서원한 보살로서 慈悲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불교의 탄생지인 인도는 물론이고 한국, 중국, 일본에서도 염원의 대상으로 대중들이 널리 신봉한 대상이었다. 불교문화사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여러 가지 다양한 신앙을 낳는 계기가 된 보살이다. 대승불교가 유행한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후기부터 관음신앙이 유행하기 시작해 법화경, 아미타경, 화엄경, 능엄경을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됐다.
 

관음보살은 阿彌陀如來像을 지장보살이나 대세지보살상과 같이 협시하는 8대 보살로서도 표현되며 대체로 한손에는 持物로서 淨甁을 들고 있으며 다른 한 손에는 寶珠를 들고 있는 경우도 있다. 머리에는 三面寶冠(정면에 작은 부처를 새겨 넣는 경우가 많다)을 쓰고 목에는 목걸이와 몸에는 화려한 瓔珞裝飾으로 꾸미고 팔찌를 차기도 한다. 몸통의 상반신에는 天衣를 걸치며 하반신에는 치마형태의 벌어진 裙衣를 입고 있다.

관음신앙이 확대되는 시기에는 각 지역의 민간신앙과 결합돼 새로운 불교신앙으로 특성화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는데 우리나라는 특히 왕조의 교체기인 삼국시대말기, 남북국시대 신라말기, 고려말기의 정치적·사회적 혼란기에 민간에 널리 퍼져 신봉됐다. 어려운 시기에도 관음보살은 수월관음보살, 천수관음보살, 십일면관음보살로 주로 제작되고 이러한 관음신앙이 가장 많이 확산됐던 사찰의 관음전이나 원통전에 모셔졌으며 양양의 낙산사, 강화도의 보문사, 남해의 보리암을 대표적인 도량으로 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관음보살상은 국보 제127호로 지정된 ‘금동관음보살입상’(사진1)으로 1966년에 서울 삼양동의 한 가정집 담장수리 도중에 우연히 땅속에서 발견됐다. 오른손은 뚜껑이 있는 정병의 목을 쥐었고 왼손은 약간 올려서 엄지와 검지를 벌리고 있는데 아마도 보주를 잡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 7세기경에 제작된 불상은 확실하지만 國籍은 불확실하다. 이 외에도 충남 부여 규암리에서 출토돼 국보 제293호로 지정된 ‘금동관음보살입상’(사진2)과 충남 공주 의당면에서 출토돼 국보 제247호로 지정된 ‘금동관음보살입상’(사진3)이 확실한 백제불상으로 전해지고 있다.

경북 구미 선산군 고아면에서 공사중에 출토돼 국보 제183호로 지정된 ‘금동보살입상’(사진4)은 머리의 보관에 부처가 새겨져있고 오른 손에는 보주를 들고 있으며 왼손에는 정병을 쥐고 있는 형상이지만, 현재 이 정병은 유실된 상태다. 경북지역에서 출토된 신라불상으로 여겨지지만 X자로 교차된 영락장식을 비롯해 T자형 목걸이장식, 굴곡진 대좌의 외반된 연판문, 우아한 상호 등 전체적인 모습은 백제관음보살상의 형식에 근접한다. 반면에 함께 출토돼 국보 제184호로 지정된 ‘금동보살입상’(사진5)은 (사진4)와 비교하면 보관의 형태, 얼굴의 생김새, 입상의 자세, 영락장식의 형식 등이 전혀 다르다. 이 두 보살상은 모두 신라의 영역에서 출토돼 신라불상으로 간주되지만 정밀한 考證이 필요하다

고구려의 금동관음보살상은 확실한 유물이 전해지지 않는다. 발해의 금동관음보살상(사진6)은 일본 도쿄박물관에 소장된 유물이 있다. 왼손에는 정병이 들려있고 머리에는 부처가 새겨진 삼면보관을 쓰고 있으며 몸에는 X자형태의 영락장식을 두르고 있다. 남북국 신라시대에 들어서면 다양한 종류의 관음보살들이 제작되며 수량도 많아진다(사진7~9).

(사진10)은 근년에 새로 발견된 남북국 신라시대에 제작된 ‘金銅觀音菩薩立像’이다. 기존의 근엄한 보살상들과는 달리 천진난만한 얼굴을 한 수수하고 친근한 모습으로 민중과 거리감이 없다. 대좌를 포함한 높이가 23cm로 제법 큰 불상이며 신체에 비해서 커다란 머리에는 삼면보관을 착용했는데 정면에 寶冠의 일부가 떨어져서 化佛은 확인할 수 없다. 오른손은 올려서 보주를 잡았던듯하고 왼손은 내려서 정병을 쥐고 있다. 몸체의 상반신은 裸身이며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天衣를 감고 양 어깨의 천의는 길게 늘어뜨려서 대좌의 연판까지 내려오지만 오른편의 천의는 중간부분이 소실됐다. 양 팔의 손목에는 팔찌를 착용했으나 화려한 목걸이나 영락장식은 없다. 하반신의 裙衣는 허리부분과 정강이부분에 삼단주름으로 간략히 표현했으며 두 발은 가지런히 모아져있다.

둥그런 원형의 대좌(사진11)는 眼象위에 간략화 된 앙련과 복련의 연꽃이 장식돼 있으며  이 보살상 뒷면의 머리와 몸통, 다리부분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는데 남북국시대 신라에서 성행하던 밀납주조방식으로 주조한 흔적이고 허리 쪽에는 광배를 달았던 돌기가 튀어 나와 있다(사진12~13). 몸체와 대좌의 일부분에는 鍍金한 흔적이 남아 있고 청동으로 주조한 후에 세부표현을 위해 음각한 흔적은 없고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다.

이 시기에 제작된 대부분의 新羅菩薩像들은 화려한 보관과 영락장식과 목걸이, 팔찌를 하고 있으며 얼굴은 거의 다 근엄하다. 인간위에 군림하는 神의 형상으로 제작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관음보살상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미소와 잘록한 허리, 볼록 튀어나온 배, 허전할 정도로 수수한 장식이 오히려 매력적이다. 보살상의 근엄함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돼 보이고 동네 꼬마처럼 해맑고 친근하다. 아마도 民衆을 대상으로 지방의 작은 암자에서 근근이 조성돼 모셔진 것으로 보인다. 귀족이나 왕실을 위해 조성된 불상이 아니고 민중의 구원을 위한 작은 정성들이 모여져서 조성된 불상인 것이다. 천년을 한결같이 이 작은 보살님은 얼마나 많은 소원을 마음에 담아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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