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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은 곧 정의" … 권력가의 조력자는 무엇을 먹으며 충성을 바쳤을까?
"힘은 곧 정의" … 권력가의 조력자는 무엇을 먹으며 충성을 바쳤을까?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7.12.04 18:5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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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음식-음식의 문화사_ 11. 호위무사 코미타투스(comitatus); 그들의 음식, 義理
바랑족 근위대. 바랑인(바랑기아인)은 9세기에서 10세기에 동남쪽으로 이주해 지금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일대에 정착한 바이킹족의 일파다. 통상업, 용병 등으로 활약했는데, 비잔틴제국에서 용맹스러운 용병 그리고 제국 황제의 근위대로 활약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
바랑족 근위대. 바랑인(바랑기아인)은 9세기에서 10세기에 동남쪽으로 이주해 지금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일대에 정착한 바이킹족의 일파다. 통상업, 용병 등으로 활약했는데, 비잔틴제국에서 용맹스러운 용병 그리고 제국 황제의 근위대로 활약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

‘外山純霞 松泉外史’―어느 茶匙에 쓰인 글
“차카르(chakar)는 본성이 용맹하고 사납다. 그들은 죽어서 집에 돌아오길 원한다. 전장에서의 어떠한 적도 그들을 상대할 수 없다.”(현장 삼장의 『서역기』 )

역사란 알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알 수 없는 건 인간사다. 오늘날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있게 한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는 독일에서 태어났다. 자신은 태어나는 지도 모르고, 왜 태어나야 하는지도 모른 채 태어났겠지만, 1818년 5월 5일, 우리나라 어린이날 지구라는 행성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그 당시 우리나라는 李氏가 지배하는 조선이라는 왕조국가여서 어린이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와 반대편에도 독일이라는 나라는 없었다. 프러시아 제국이 유럽의 맹주 역할을 하고 있던 시절, 프러시아 라인란트(라인강 하류)의 트리어(Trier)라는 소읍에서 그가 태어났다.

그의 출생은 역사적이 됐다. 자신은 의도하지도, 짐작도 못했겠지만, 그의 사상과 그가 남긴 책이 인류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물론 엥겔스가 없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제 식구들을 돌보지 않고 내버려두다시피 했다(방치했다라는 표현이 더 냉정하게 들릴까?)는 것은 비난 받아 마땅하다. 그럼에도 그는 역사의 물결을 바꿔놓았다. 러시아를 붉게 물들였고, 붉은 혁명의 이름으로 동유럽과 중앙유라시아, 거대한 제국 중국을 인민이 평등한 나라로 뒤바꾸려 했다. 그러나 그건 애당초 ‘불가능한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이었다.

혁명가가 되려면 주변에 보좌세력이 있어야 한다. 마르크스는 행동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레닌은 행동파였다. 볼셰비키 혁명을 주도한 그의 저력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기반으로 민중을 앞세워 지상 마지막 제국주의 왕조인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리고 사회주의공화국인 소비에트 연방을 탄생시켰다. 역사상 보기 드문 무혈혁명이었다. 레닌의 성공은 민중의 지지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분열해 생긴 좌파 세력 볼셰비키 때문이다. 이성계도, 왕건도, 주몽도, 칭기즈칸도 다 지지세력 내지 보좌 집단이 필요했고, 실제로 그랬다.

사클라이, 투멘 그리고 주몽

“사클라이(Saklai) 북쪽에서 어떤 왕자가 신비롭게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태양신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강의 신의 딸이었지만, 그 나라의 왕은 아이를 빼앗아 맹수들에게 갖다 버렸다. 그러나 야생 돼지와 말과 새들이 따뜻하게 해주었고, 그래서 아이는 죽지 않았다.

아이를 죽일 수 없었기 때문에 왕은 아이의 어머니에게 아이를 길러도 좋다고 허락했다.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자 왕은 그에게 왕의 말을 관리하라고 했다. 그는 활을 아주 잘 쏘았기 때문에 투멘(T?meN)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왕자들은 왕에게 경고했다. 투멘이 너무 위험하며, 왕국을 전복시킬지도 모른다고. 왕자들은 투멘을 죽일 계획을 세웠지만, 투멘의 어머니는 때마침 투멘에게 위험을 알렸고, 투멘은 남쪽으로 도망쳤다. 건널 수 없는 강에 맞닥뜨리자 투멘은 자신의 활로 강물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나는 태양의 아들이며 강의 신의 손자다. 적들이 나를 뒤쫓고 있다. 어떻게 하면 강을 건널 수 있겠는가?”그러자 악어와 자라들이 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투멘이 강을 건넌 뒤 다리는 사라졌고, 투멘의 적들은 더 이상 투멘을 추격할 수 없었다.

투멘은 수도 투멘오루트 투(Ortu)를 건설하고 새로운 왕국을 세웠다. 그의 영토는 네 부분으로 나뉘어졌는데, 네 방향에는 각각 지배자(*Ka)가 하나씩 있었다.(『중앙유라시아 세계사: 프랑스에서 고구려까지』, 크리스토퍼 벡위드 지음, 이강한·류형식 옮김, 소와당, 2014, 55~57쪽)


위의 글을 읽고 나는 궁금했다. ‘사클라이’가 어디지? 유목민 사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이름의 소유자 ‘투멘’은 누구지? 사클라이’는 『후한서』에 나오는 ‘索離(색리)’라는 나라 이름을 표기한 것인데, 사실 이 이름은 『論衡』에는 ‘橐離(탁리)’라고 적혀 있고, 『삼국지』의 주석 중 하나인 배인(裵駰)의 주석에 인용된 『魏略』에는 ‘高離(고리)’, 『後漢書』에는 ‘索離’로 표기돼 있다. 내 생각에 정론은 아니나 ‘橐(탁)’과 ‘索(색)’은 모두 ‘藁(고)’의 오기로 고리국이 정확한 나라 이름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위치는 만주 송화강 북쪽으로 비정한다.

따라서 투멘은 고구려를 세운 朱蒙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글에서 정작 중요한 부분이 빠졌다. 주몽이 목숨을 부지하고자 도망 나올 때 그의 곁을 지켜준 의리의 사나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라는 이름의 세 남자로 이들은 주몽과 어떤 관계였을까? 주군과 그를 목숨 바쳐 지키는 협객? 명칭은 뭐라 해도 좋다. 중요한 건 이런 관계가 동서를 막론하고 곳곳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인간이 얼마나 복잡하게 살고 있는지, 얼마나 교묘하게 혹은 교활하게 목숨을 유지하는지를 살펴보려한다. 줄타기와 같은 아슬아슬한 삶의 투쟁에서 떨어지지 않고 살아남으려는 처절한 욕망, 언제고 버려야 할 그 욕망에 사로잡혀 오늘도 인간은 어리석게, 복잡하게, 치사하게 산다. 단순함을 인간은 좋아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해 인간은 잘못을 범하고도 시치미를 떼고, 극악무도한 죄를 짓고도 책임전가를 하고, 죽지 않으려고 거짓을 말하고, 죽는 게 싫어 악다구니를 한다. 그냥 죽으면 되는데, 때론 무모한 발악을 한다. 태생적으로 인간은 잘못을 인정하고 겸허하게 죗값을 치르려는 단순한 선택에 익숙하지 않다. 변명과 합리화에 능하다. 그 대신 삶의 구조를 복잡하게 만든다. 고래로 인간이 사는 세상의 진리는 ‘힘이 곧 정의(Might is right)’라고 할 수 있다.

대중에게 단식의 의미를 전한 승려가 숨어서 먹는다. 금욕의 덕성을 강론한 승려가 안전한 私室에서 꽃다운 처녀를 품에 안는다. 몰래 먹은 음식은 스릴이 있어 좋고, 힘으로 꺾은 꽃은 정복의 기쁨을 주기에 어여쁘다. 정상의 식사, 떳떳한 관계는 밋밋하다. 힘을 가진 자들은 이렇게 자기 좋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할 수 있다. 그런 자유를 힘이 마련해준다.  그래서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힘을 동경한다. 이를 일러 니체는 ‘권력을 향한 의지(Will to Power)’라고 했다.

권력자는 고민이 컸다. 자신의 신변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했다. 어중이떠중이 모르는 사람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고향 사람들이 나았다. 스칸디나비아 추운지방에서 순록을 따라 따뜻한 남쪽 지방으로 내려온 바랑고이족이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 쯤에 자리를 잡고 나라를 세웠다. 키예프 공국이다. 비잔틴 제국과는 이런저런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988년 이 두 나라 지배자들의 거래가 역사의 흐름을 바꾸게 된다.

로마시대의 정예집단과 비잔틴 제국의 ‘바랑족 근위대’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바실리우스(Basilius), 키예프공국의 군주는 블라지미르(Bladimir). 정치 군사적으로 위기에 몰린 비잔틴 황제가 키예프의 지배자에게 군사 원조를 청한다. 당시 블라지미르에게는 근위대원의 숫자가 너무 많아 급료를 제대로 주지 못할 형편이었다. 핑계 김에 블라지미르는 자신의 호위대 20만 명을 바실리우스에게 보낸다. 통 큰 결단이나 속사정은 돈이었다. 감격한 바실리우스는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여동생 앤(Anne)을 블라지미르와 결혼시키기로 한다. 물론 앤은 반대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한 일에 어쩔 수 없이, 키예프를 향해 떠난다. 이때의 결혼 행렬이 장관이었던 모양이다. 문명세계를 대표하는 비잔틴 제국의 황녀를 배우자로 맞이하는 키예프 루스(Kiev Rus) 블라지미르의 가슴은 감동과 놀람으로 가득 찼다. 이 일이 그로 하여금 기독교로 개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는 민중들도 따라서 기독교인이 되라는 칙령을 반포한다. 세상은 이렇게 돌아간다. 다수의 백성은 어떤 결정권도 없고, 소수의 지배집단이 국가의 명운을 가른다.
 
공화정시대 로마에서도 군사지휘관을 수행했던 정예 집단이 있었다. 코미타투스(comitatus)가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10~14세기 비잔틴 제국 황제들의 개인 경호팀 ‘타그마 톤 바랑곤(Tágma tōn Varángōn)’이 그 중 하나다.   ‘바랑족 근위대’라는 뜻의 이들 엘리트 황실 지킴이들의 운명은 욕망을 가진 누구나의 운명과 다를 바 없다.
 
입회와 함께 엘리트 황실 근위병이라는 신분이 주어지면서 이들에게 주어지는 급료는 아주 고액이었다. 그런데 부유한 집안 남자들만 입회가 가능했던 것으로 미뤄 금으로 지불되는 고액의 사례가 근위대에 들어가는 문턱의 관리인 노릇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휘관이 적진으로 몰래 급습해 들어갈 때 자신을 수행할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코미타투스가 민회에서 구성됐다. 코미타투스의 구성원은 대개 비교적 생활이 부유한 전사들로 이들은 스스로 그 일을 하겠다고 자원하고 나섰다. 이 당시 지도자와 코미테스(‘동료’라는 뜻)라 불린 부하들 사이의 관계는 잠정적인 것으로 단지 습격을 벌이는 동안에만 유지됐다. 후일 이 제도는 영구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지도자는 코미타투스를 먹여 살렸고, 따라서 전쟁 때뿐만 아니라 평화 시에도 이들을 자기 주위에 묶어둘 수 있었다. 또한 무기와 말을 제공했으며 전리품도 함께 나눴다. 그렇게 해서 다른 전사들로부터 제지를 전혀 받지 않는 군사집단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코미타투스에 소속된 전사들은 지도자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고 싸웠으며 지도자보다 더 오래 산다는 것은 그들에게 치욕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비겁하게 사느니 명예롭게 죽기를 원하고 선택했다.

내가 일본인의 장점을 생각할 때 제일 이해하기 힘든 것이 할복이다. 우리에게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민족적 원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을 때 그의 부인과 측근 사무라이들이 취한 행동은 말로서 설명하기 힘들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시 얘기하게 될 것이다.

한편 인도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따라 죽는 것이 미덕이다. 불타고 있는 시신을 둘러싼 애도의 무리들은 망자의 아내가 불길 속으로 뛰어들 순간을 기다린다. 여인은 그런 기대를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두렵다. 망설이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왜 따라 죽어야 하는지 납득하지도 못하고, 설사 그래야 할 까닭을 이해했다 해도 사람은 스스로 목숨 던지기가 절대 쉽지 않은 법이다. 누군가 실수를 가장해 울먹이며 머뭇거리고 있는 여인을 불길 속으로 밀친다. 놀랄 새도 없이 여인은 가문의 명예를 지킨 열녀가 된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죽어가는 여인에게 열녀는 의미가 없다. 사티(sati)라는 고약한 풍습은 여자에게만 절개를 요구하는 악독한 문화다. 이런 잔혹상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러시아 천년기념비에 묘사된 블라디미르 1세의 조각상.  출처=https://ko.wikipedia.org
러시아 천년기념비에 묘사된 블라디미르 1세의 조각상. 출처=https://ko.wikipedia.org

 

‘의리’를 위해 암살을 가한 5인의 자객

사마천의 『사기』 「刺客列傳」은 의리 때문에 암살을 감행한 5인의 테러리스트 이야기가 나온다. 조말, 섭정, 예양, 전제, 형가라는 협객 중에서 豫讓의 신의가 무엇보다 가슴을 울린다. 그는 晋나라 사람이다. 일찍이 范氏와 中行氏를 섬겼으나, 인정을 받지 못하여 범씨·중행씨를 떠나 智伯이라는 대인을 섬겼다. 지백은 예양을 존경하고 또 사랑하며 예우했다. 어느 때 지백이 趙襄子를 치게 됏다. 조양자는 韓氏, 魏氏와 공모해 지백과 그 자손들을 다 죽이고 재물과 땅을 삼분해 취했다. 무슨 까닭인지 조양자는 지백을 죽이고도 직성이 풀리지 않아 그의 두개골에 옻칠을 하여 술잔으로 만들어 썼다. 예양은 산 속으로 도망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아아,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고, 여자는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하여 화장을 한다’고 한다. 지백은 나를 알아주었으니 나는 반드시 그의 원수를 갚고 죽을 것이다. 그리하여 비록 죽더라도 지백에게 보답할 수 있다면 나의 혼백은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름을 바꾸고 조양자를 죽일 기회만 노렸으나 결국 허사로 끝나고 조양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호위무사로서의 그의 자세가 대단히 아름답다. 예양을 죽이기에 앞서 조양자가 말한다.

“그대는 일찍이 범씨와 중행씨를 섬기지 않았는가? 지백이 그들을 전부 멸망시켰는데도 그대는 범씨와 중행씨를 위하여 원수를 갚기는커녕 도리어 신하의 예를 취하여 지백의 신하가 되었다. 그 지백도 이미 죽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지백을 위해서는 원수 갚기를 이다지 깊게 하는가?”

이에 대해 예양이 답한다.
“분명 범씨와 중행씨를 섬겼습니다. 그러나 범씨와 중행씨는 다 나를 여러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대우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평범한 사람에 대한 예로써 그들을 대했습니다. 그런데 지백은 나를 國士로 대우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국사로서 그에게 보답하려는 것입니다."

호위무사(escort warrior)는 일찍이 유목민 사회에 존재했던 혈맹 조직원이다. 자신들이 섬기는 주군에 대한 이들의 충심과 헌신의 정도는 일개 범부로서는 이해하기도 따라 하기도 어렵다. 평화의 시기에는 친위대의 구성원으로 주군의 권위나 위엄을 돋보이고, 전쟁이 벌어지면 주군을 밀착 보호하는 존재인 호위무사들은 평상시엔 경계병 노릇을 하기도 했다. 칸(khan) 개인을 보위함은 물론 식솔들의 안위까지 살폈다.

 『大唐西域記』 卷一 ‘颯秣建國’條에는 ‘赭羯(chakar)’이라는 이름의 호위무사 집단을 소개하고 있다. 과거에는 서역에 속했던 삽말건국은 오늘날의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를 가리킨다.

 『歷代胡族王朝之民族政策』이라는 책에서 劉學銚는 ‘赭羯也月氏之人’ 즉 자갈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집단이 월지인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 근거로 『隋書』 卷八十三 康國傳의 ‘其人皆深目高鼻多鬚髥’이라는 구절을 들고 있다. 자갈의 체질적 특징이 晉나라 때 羯人과 서로 같은데, 이는 康國 즉 사마르칸드가 흉노에 위력에 복속된 후 ‘갈인을 사로잡아 전사로 만든’(虜其人爲戰士)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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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2017-12-05 16:46:23
맨 앞에 인용된 시의 출처와 내용이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