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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단 하나의 작품 남긴 '벽초' … 소설로 꽃피운 民族誌의 가능성
일평생 단 하나의 작품 남긴 '벽초' … 소설로 꽃피운 民族誌의 가능성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7.11.28 12: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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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_ 제32강 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의 「『임꺽정』, 한국어의 보고」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의 2017년 강연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이 강연 4섹션 ‘문학’ 영역으로 이동했다.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 강연은 34강에 걸쳐 새로운 시대로 도약을 가능케 한 역사적 인물 혹은 작품을 선정해 혁신적 사유를 조명해보는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의 네 번째 강연 시리즈다. 다섯 번째 ‘문학’ 강연을 맡은 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의 제32강 「『임꺽정』, 한국어의 보고」 발표문 일부를 요약 발췌했다.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벽초 홍명희는  식민지 시대에 우리 사회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존경을 받으며 많은 일화로 인구에 회자된 인물이다 물론 그의 명성은 20세기 전반 한국의 최장 대하소설인 『임꺽정』의 작자란 사실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임꺽정』이 우리말 어휘를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우리말의 보고이며 우리말이 가장 적정하고 동시에 순정하게 쓰인 모범 사례라는 사실은 문학인이나 지식인 사이에서 거의 만장일치라 할 수 있는 비평적 동의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문학계 혹은 문단에서는 언제나 국외자였으며 어느 한때도 그 중심에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임꺽정』 이외에 어떠한 작품도 보여준 바 없다. 그점에서 그는 『님의 침묵』 한 권만을 가지고 20세기 최고의 시인 반열에 오른 만해 한용운과 흡사한 점이 있다.

만해 한용운과 흡사한 지점

그의 삶을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구체적 상황을 알아두는 것이 필요하다. 그가 태어난 1880년대는 1882년의 임오군란과 미국과의 통상조약 체결이 주요 사건으로 부각되는 시기다. 1883년은 마르크스가 세상을 뜬 해지만 1884년은 개화파의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이 일어난 해다. 한말의 정세가 불안정하면서도 신속하게 동요하던 시기였다. 1875년에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토마스 만이 출생했고 벽초가 태어나기 20년 전에 일본서 이른바 메이지유신이 시작됐다는 것을 상기하면 시대 상황이 대충 상상될 될 것이다.

그의 유년기는 조숙한 신동의 행적을 보여준다. 8세에 『소학』을 배우고 한시를 시작했다는 그는 11세에 한문으로 중국 소설을 탐독한다. 벽초의 이력 중에서 이색적인 것은 한문 고전 교열을 했다는 점이다. 1939년에 신조선사에서 간행된 홍대용의 문집 『담헌서(湛軒書)』, 1941년엔 서유구의 『鏤板考』를 교열했다. 일제 말기에 이런 옛 책 교열을 맡았다는 것은 벽초의 일관된 조선 탐구 지향을 보여주면서 그의 생활고를 방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공인된 한문 조예 때문에 맡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한적을 교열할 수 있는 당대의 태두요 권위였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에 연재한 칼럼을 모은 『學窓散話』(1926)나 <조선일보>에 연재한 「養雜錄」(1936)의 문장은 그 온축의 깊이를 보여준다. 중국 고전과 우리 쪽 옛 책을 들락날락하는 필치가 자유자재다.

벽초의 인품에 대해서는 누구나 겸양과 공손을 말한다. 유약해 과단성이 부족하다는 과격파의 평언이 있으나 야심과 패기가 없다고 지적하면서도 “전형적인 학자요 전형적인 귀족 타입이요 또 전형적인 長者風이 있는 분”이라며 “명문 출신이면서도 교만이란 조금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인품과 박람강기와 총명함과 40년 苦節이 중학밖에 나오지 않은 그를 국립대 총장으로 추대하자는 일부 의견을 내게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임거정』은 1928년 11월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되다가 서너 차례의 중단을 거쳐 1940년 <조광> 10월호 연재분을 마지막으로 미완인 채 중단됐다. 투옥과 병고로 인한 중단이지만 어쨌건 13년에 걸쳐 집필한 것이다. 1928년은 중국에서 북벌을 재개하고 일본이 치안유지법을 개악해 사형을 추가하고 일본군이 장작림을 폭사시킨 해이다. 1940년 8월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된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러한 작가적 야심과 포부는 일차적으로 『임꺽정』을 모든 독자들이 경탄해 마지않는 우리말의 보고이자 가장 능란한 우리말 구사의 모범 사례로 만들어줬다.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자유로운 모국어에 의한 발상을 중시해 사실상 후속되는 민족문학론의 맹아를 보여줬다. 그러한 생각을 이어받아 우리말로 가장 호쾌한 문학 세계를 성취해낸 것이 20세기 전반에 나온 『임꺽정』이다. 누구나 그 풍부한 어휘에 감탄하는데 ‘조선어 광구의 노다지’라는 왕년의 조선어학회장 이극로의 논평은 핵심을 찌르고 있다.

벽초의 산문이나 대담에서는 그의 동양의 지적 전통에 대한 조예를 반영해서 요즘에 거의 쓰지 않는 한자어가 많이 나온다.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우리말은 커다란 변화를 갖게 됐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한자어에서 파생됐다 하더라도 거의 토착화된 우리말 또 한자어로 소급해서 추정할 수 없는 우리말 어휘가 주로 쓰여 있다. 작가의 풍부한 우리말 어휘는 동양 지적 전통에 대한 소양과 마찬가지로 그의 총명함과 또 왕성한 지적 호기심의 결과일 것이다.

벽초의 비허구 산문이나 대화에 나오는 어휘는 요즘 세대에게는 고문에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만큼 해방 전후에 그리고 특히 해방 이후에 우리의 생활 언어가 크게 변한 것이다. 변화의 대세는 재래의 우리식 한자어가 일산 한자어 혹은 일인 선호의 한자어로 대체돼간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물론 구미 언어가 귀화 어휘로 자리 잡는 것이나 토박이말이 한자어를 대체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해방 이후 특히 21세기로 접어든 오늘에도 일산 한자어는 끊임없이 유입돼오고 있다. 한자가 일제가 아니기 때문에 엄연한 일산 한자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것인 양 쓰이고 있다. 언어 변화도 자연스러운 사회 변화의 일환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위적으로 막을 필요도 막을 수도 없다는 입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많은 어휘를 보유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문화유산을 풍부하게 보존하는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과 마음을 그만큼 정교하게 운영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 가령 이웃 나라 일본의 문학적 잠재력이 옛말과 고유어를 풍부하게 옛 작품 속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크게 연관된다고 생각한다. 전통이란 살아 있는 과거가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말을 통해서이다. 옛말을 많이 가지고 있지도 기억하지도 못하는 우리는 그만큼 빈약한 문학적 현재를 가지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임꺽정』의 어휘에 감탄하고 공허한 찬사를 바치면서도 우리는 어휘 습득에 기울인 그의 문학적 노력을 전범으로 삼지는 않았다. 프랑스 아카데미가 보여줬듯이 어느 정도의 자정 노력도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벽초의 어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소설 『임꺽정』에 나오는 어휘는 놀랄 만큼 풍요하고 그 자유로운 구사는 경탄에 값한다. 물론 구질서 아래서의 생활과 관련되는 것이어서 많은 한자어와 마찬가지로 용도폐기 되거나 되게 마련인 어휘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화받이, 두길보기, 구메혼인, 이리위 저리위하다, 공먹히다, 싸다듬이하다, 명토 없이 묻다, 닛다홍 무명저고리와 갈매빛 무명치마와 같이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더라도 우리가 아깝게 버린 말과 어법들이 너무나 많다. 소중한 우리말을 버리고 한자어라는 표면상의 유사성 때문에 구별 없이 일본어를 쓰는 폐습은 상습화돼 있다. 『임꺽정』 읽기는 우리의 일본어 의존에 대해서도 좋은 계고가 되고 반성의 계기를 제공한다.

아울러 『임꺽정』을 읽지 않고 우리말에 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한다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라는 것도 부언해두고 싶다. 가령 ‘나의 살던 고향’이 일본어를 모방한 잘못된 어법이라는 얘기가 우리 사이에는 널리 퍼져 있다. 주요 일간지의 기명 칼럼에서도 그런 주장이 버젓이 실려 있었다. 동요 시인 이원수가 만년에 그 사실을 자괴했다는 말까지 쓰여 있었다. 중세(15세기) 국어에서는 현대 국어에서와는 반대로 주격조사 ‘이’보다 관형적 조사 ‘의’가 더 일반적으로 쓰였다. 즉 ‘나의 살던 고향’은 아주 우리말다운 어엿한 우리말 어법이다. 아직도 ‘나의 살던 고향’이 일본어의 흉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임꺽정』을 읽고 회개하고 자괴하기를 권면하고 싶다. 작품에는 ‘나의 살던 고향’ 투의 말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1920년대에 ‘조선주의’가 팽배한 시절이 있었다. 양주동의 『조선의 맥박』, 변영로의 『조선의 마음』과 같은 시집 표제에도 그것이 드러나 있다. 조선주의는 우리 역사에 대한 계몽적 조명이나 국토 기행문의 융성의 형태로 표현되기도 했다. 이 작품이 더러 글자로 풀어 쓴 대동여지도나 축소된 『택리지』의 형국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단순히 등장인물의 지리적 이동의 실상을 보여주기 위한 소설적 세목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다. 그것은 국토에 대한 지식과 애정을 함양해야겠다는 조선주의적 충동을 당대의 국토 기행문과 공유한 것이고 작자가 말하고 있는 조선적 정조에의 충실을 위한 조처였다고 생각된다.

작품에서 중요 지리적 단위가 되어 있는 청석골의 위치와 주위 지리가 상세히 서술돼 있다. 일반 독자로서는 머릿속에서 정연하게 시각화하기가 쉽지 않지만 일단 세밀하게 적혀 있다. 작가편의 지리적 고증이 없다면 쓸 수 없는 지문이다. 치밀한 세목 서술은 그러나 작품의 리얼리티 조성에 기여해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 세계에 빠져들고 얘기의 진행에 순순히 동조하게 만드는 설득력을 갖고 있다. 이러한 설득력은 전편을 통해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地誌的 성격보다 두드러진 것은 民族誌의 성격이다. 작가가 밝혔듯이 이 장편은 각각 독립된 듯한 긴 단편이 연작 형식으로 되어 장편을 이루고 있다. 소설이 본격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증, 울음, 웃음이라는 서사의 세 가지 요소를 『임꺽정』은 넉넉하게 가지고 있다.

고문에서나 볼 수 있는 벽초의 어휘

그런데 조마조마하며 웃음과 울음 사이를 오가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성 질서 속에서 특혜적 위치를 차지하고 아랫것들을 부려먹고 괴롭히는 부패한 양반층과 기성 질서에서 일탈하여 살고 있는 반체제적 변방인들 사이의 사회적 대립의 관계이다. 반체제적 변방인들이 정의를 구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부정의에 저항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고 이에 독자들이 심정적 응원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망국 이후 일단 망명의 길로 떠나보았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귀국하여 식민지 체제하에서 문화 실천을 통해 자기완성과 사회적 기여를 도모한 인물들이 있다. 호암 문일평, 위당 정인보, 춘원 이광수를 우리는 열거할 수 있다. 벽초도 그중의 한사람이다. 8·15 해방에 임해서 우리가 이렇다 하게 해방에 기여한 바 없다는 국민 다수의 보편적 자격지심은 해외에서의 정치투쟁을 한껏 숭상하고 높이 평가하게 했다. 그것 자체는 당연지사이나 그것이 문화 실천에 대한 상대적 과소평가를 수반했다는 것은 공정하거나 균형 잡힌 일이 못 된다. 정치 실천 못지않게 문화 실천이 중요했으며 그 후속적 영향력이란 맥락에서는 후자가 전자를 오히려 능가한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벽초는 단 하나의 작품밖에 남기지 않았고 그것도 미완으로 끝났다. 미완으로 끝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작가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단 한 편만 남겼다는 것은 작가의 총명함의 소치이며 그것이 식민지 시절의 문화적 실천 중 가장 우뚝한 봉우리이자 상록수라는 것은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오점을 남긴 춘원과 달리 삶의 도정이 시종여일했다는 것도 기억할 만한 덕목이라는 것을 첨가하는 것은 아마도 사족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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